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
박홍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이런 종류의 책은 어디에 분류해야 할 지 난감하다. 합치고 아우르는 것이 어려운 만큼 나누고 가르는 일도 쉽지 않다. 박홍규의 책 중에서 직설적인 감정이 많이 우러나온 책이다. 감정은 내면이나 의식에서 배어나오는 이성의 작용이다. 이 감정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이 조건 없이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 사람들이 가진 삶의 조건, 인생의 가치와 일상의 모습 등을 통한 이성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내면에서 외부로 표출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외부 세계를 투과한 감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거대한 명칭은 듣기에도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은 ‘대영제국’을 모방한 명칭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떠하며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구수만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박홍규의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거울은 사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비춰주지만 인간의 시선과 관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주관적 시선을 뒷받침하는 사상과 이념은 객관적인 평가와 이성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나 삶의 가치가 다를 경우 저자의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돌아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저자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우리는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발전과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니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졌다. 물론 비교의 기준은 20세기 이전을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시속 150km가 넘게 속도를 내면 시야가 좁아진다.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풍경을 감상할 여지가 없어진다. 김광규의 시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 처럼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시간과 속도의 경쟁은 무한하다.

  그렇게 살다보니 타성에 젖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시골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박홍규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초등학생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 없이 세상을 향해 쓴 소리를 뱉어내는 모습이 과연 불만과 불평을 토해내는 것인가? 개인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것은 이런 사회 비평 서적이 나와도 눈여겨보고 자신의 모습이나 우리들의 현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늘어나느냐의 문제이다. 항상 결론은 실천이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른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견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욕에 오염된, 돈으로 분단된, 힘으로 왜곡된, 공공이 상실된, 인조로 추악한, 획일로 위기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시민이 <대한민국 개조론>을 한 달 만에 썼다고 했는데 박홍규도 이 책을 일본에서 한 달만에 썼다고 한다. 전혀 다른 관점과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두 책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시민과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일리히의 책을 번역하고 실천에 옮기며 살아가는 박홍규는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쪽이며 똑같이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얼마나 다른 진보와 개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며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와 기준도 다르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생활에 이끌려 내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추듯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가?

  2007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비현실적으로 해석한 책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가치 등에 대한 총체적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아니 이 책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될 것이다.


071215-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1-1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존(自尊)은 자존(自存)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자존(自存)이라는 것이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자아 존중감이 형성될 수 있다. 세계 혹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인식 방법이 자존심의 출발이다. 마음은 자아 정체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는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든다. 결국 자존심은 타자와 세계가 나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대의 경우 우리의 삶은 불안해지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험해진다. 내가 삶을 이끌지 못하고 생각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개인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존심을 지켜나간 사람들은 존경을 받는다. 신영복의 말처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기적 욕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고뇌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는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모습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과 사소하고 당당한 실천만이 조금 더 살만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하종강, 아노아르 후세인, 정희진, 박노자, 고미숙 등 8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 한해도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004년부터 매년 봄 특강을 하고 그해 가을이나 겨울에 책으로 묶어낸다. 2004년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005년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2006년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을 주제로 삼았고 올해는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으로 특강이 이루어졌다. 매년 이 책들을 읽으며 내년 봄에는 특강을 듣고 싶다는 생각만 4년째 하고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년에도 책을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로 인문, 사회, 과학, 여성, 노동, 역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라 명명될 만한 사람들이다. 활자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하지만 강연을 듣는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책이다. 특강이 이루어지고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은 예년과 같다. 인위적인 시대구분이지만 21세기도 이제 7년이 지나간다. 20세기와 다른 세기를 살아간다는 특별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속도감을 경험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적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알아도 고치려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외면한다. 이기적 욕망을 자존심으로 착각하거나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침해를 알지 못하거나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만을 지켜나가는 자존심이 가능할까.

  다른 책을 통해서 한두 번 이상 만났던 사람들이지만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또 강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새롭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고미숙 등 처음 이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자존심’이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강을 찾아 들으러 가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진중권의 말대로 진짜 자존심은 자기가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삶을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나와 내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존심은 이미 자신을 버린 것이다. 주변을 돌아본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배가 불러야만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각자 다른 모양과 색깔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질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보거나 행동에 옮기다가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다. 왜 나만 이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좀 더 쉽고 편한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람, 문안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어렵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하종강의 ‘부채감’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부채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되지 않을 괴리감 때문에 고민할 정도의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와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접점을 찾는 문제가 내게는 가장 힘들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보다 보다 먼 미래와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며 고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이지만 나와 한발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혹은 조금 떨어져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하는 이유와 고민들을 풀어내고 있다. 귀 기울여 보면 많은 화두가 던져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아주 작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나의 자존심은 내가 지켜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071209-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늦은 결혼 탓도 있겠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의 아쉬움은 나이 들면서 커져만 간다. 그 분들에 대한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뵙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결코 살갑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외삼촌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낙들의 이야기다. 여성 중심이며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의 보고서에 가까울만큼 친근하고 세심하다.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잡아내고 표현해내는 솜씨는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쏟아본 소설가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위적 허구의 세계를 뛰어 넘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세계와 일상사를 샅샅이 훑어내는 입담은 글말보다 구전문학에 가깝다. 구수하고 정겹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막힘없는 솜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불편하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독자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읽는 재미와 감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의 화두를 환경과 여성이라고 했던 이윤기와 최열의 대담이 생각난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그림자에 대해. 항상 물과 공기처럼 불편을 최소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그들의 손길의 고마움과 섬세한 마음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나 늦은 등단에 대한 관심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설집을 내는 모습은 분명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며 소설가로서 영광스런 일이다. 꾸준한 독자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신감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없는 관찰로 빚어내는 천의무봉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또 그것을 억지스런 설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듯이 막힘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읽히는 단편들이다.

  철저하게 1인칭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주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대단히 사적인 영역에 머문다. 사회적 환경과 인물들로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쩌면 그녀의 소설집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랍 문화권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은 마르케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관조하는, 하지만 자유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안목과 사고의 폭이 지니는 한계는 어느 작가에게나 작용한다. 박완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의 소설을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마을 문고 책장 한쪽 벽면 먼저 읽기 내기를 했다는 어머니의 추억도 박완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남자네 집’과 같은 추억은 없었을까. 촛불 밝힌 식탁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상황과 입장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은 실버 세대의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다. 후반생에 대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들과 고민들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들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순간에는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도 없는 노년의 내 모습과 고민들은 어떤 것들일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반성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저 나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만이 오롯이 남겨지는 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넓게 혹은 좁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다. 어머니께.


071207-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 행복 시대를 내건 정동영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국가가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 슬로건에는 일자리 창출이나 가정 경제에 국한된 문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지만 돈만 있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오로지 ‘돈’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공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바라본 결혼과 가족은 어떤 의미였을지 잘 살펴 볼 수 있는 책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다. ‘책세상’의 고전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혼과 가족의 형태가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최초로 관계 맺는 사회는 가족이다. 엥겔스는 국가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최소 단위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을 번역한 책이 아니라 전체 9장 중에서 1장과 2장만을 싣고 있다. 3장부터 9장까지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사회, 문화와 사상을 주유하는 일은 단순한 산책으로 여겨 즐겁기도 하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미로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군혼 형태를 띤 혈연 가족은 원시 사회가 보여준 인류 최초의 결혼과 가족 제도의 모습이었다. 부모 자식 혹은 형제 자매 간의 성교 금지에서 출발한 푸날루아 가족과 대우혼을 거쳐 일부일처제로 정착하기까지 인류의 성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자녀에게 재산 상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대에 비하면 결혼의 역사는 남성 권력의 강화와 여성 권위가 뒤바뀌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확고하게 굳어있는 가부장제와 차별적 시선들은 결혼과 가족제도의 왜곡된 변형 그리고 사유 재산 제도의 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가운데 하나는 사회 발전의 초기에 여성이 남성의 노예였다는 점이다. 모든 야만인 그리고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미개인,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미개인들의 경우에도 여성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 P. 77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노동 해방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은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도 공유했다. 사회 발전 초기에 여성이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존재였는지 따져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여성의 모습이다.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라는 인식은 엥겔스의 결혼과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삶에서도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일부일처제를 혐오했고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으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웅변보다 감동적인 실천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죽었다. 우리가 흔히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엥겔스가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혁명 정신’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변혁과 혼란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온몸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천적 노력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혼과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와 그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와 나란히 노예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즉 남자의 처분에 맡겨진 젋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애초부터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 P. 98

  군혼에 비해 단혼이 가지는 이익과 행복은 절반의 것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단혼은 최초의 계급적 억압을 초래했으며 노예제와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것이 엥겔스의 인식이다. 모든 진보는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발전과 행복은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 중 하나지만, 동시에 노예제나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즉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으로 관철되는 시대를 열었다. - P. 102


071204-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