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1-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