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의견일 뿐이다 - 불확실한 지식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진짜를 판별하는 과학의 여정
옌스 포엘 지음, 이덕임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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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근대 철학의 출발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는 행위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존재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나’를 제외한 세상 만물과 사건을 의심하라는 충고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요?

독일의 신경심리학자 옌스 포엘은 역설적 제목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사실이 의견일 리 없습니다. 의견은 의견일 뿐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주장’이나 ‘의견’에는 해석과 감정과 판단이 뒤섞여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객관적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fact’에 차이가 생깁니다. 하나의 사실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해석과 주장이 엇갈릴 뿐이죠. 자기 생각, 즉 의견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합의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전문적인 연구자나 학문적 영역에서 갖춰야 할 정교한 논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 태도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지식은 불완전하며 과학의 역사조차 격렬한 논쟁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판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실 판단의 기본인 ‘관찰’에 소홀하면 사실과 의견 그리고 해석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확립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사실이 필요할까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의견을 뒤섞어 합리화하는 태도를 점검하지 않으면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를 점검하는 대신 대부분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입니다. 인격은 지식과 교양이 아니라 태도와 방법입니다.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점검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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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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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일까요? 치밀하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과 빈구석이 많은 사람의 선택과 판단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우리는 직관과 객관, 사실과 의견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근대 이후 과학과 이성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심리적 편향과 오류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그 이유조차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차이가 인생을 뒤바꾸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나이와 성별, 학력과 직업에 따라 문제 해결 능력과 방법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올바른 선택과 판단을 위해서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이제 곧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시대에 접어듭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최적의 선택을 제안하고 이성적 판단으로 인간의 실수를 줄여줄 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를 떠올리면 오늘의 현실은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휴먼 로봇 시대를 맞게 될 미래에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실천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쉼 없이 성찰하며 내일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혹은 좋지 않은 결과를 맞닥뜨리면 ‘나’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외부’에서 문제를 먼저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피해자’라고 믿는 착각에 빠집니다. 숫자가 ‘진실’이라는 믿음, 확률이 ‘확정’이라고 생각, 내 경험이 ‘전체’라는 심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또 너무 자연스럽게 ‘틀린 판단’을 반복하고 있다.”라는 저자의 지적이 뼈아프게 들립니다. 데이터 분석가 키코 야네라스는 사람들이 ‘직관’, 즉 해석과 주장과 예측을 마치 사실처럼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균형 잡힌 올바른 판단은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자기감정과 착각에서 한 발 떨어져 ‘객관’적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리터러시literacy 능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문해력은 기본이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평가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길러야 하는 시대입니다. 각종 뉴스와 데이터의 표면적 의미뿐만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숨어 있는 목적과 의도를 읽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주장과 해석을 진실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유통되는 정보와 습득한 지식은 과연 진실일까요?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갖추지 못하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직관보다 근거를 살펴야 합니다.

챗지피티ChatGPT나 제미나이Gemini 등 인공지능도 천연덕스럽게 허위 사실을 전달합니다. 이를 걸러내고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우연의 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딜레마에도 균형을 유지하고, 직관을 맹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기억력과 암기력이 아니라 종합적 사고력과 주체적인 판단력입니다. 사건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능력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인간다운 능력일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는 ‘나’를 바꾸지 않으면 현실과 미래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기 힘든 세상을 살아갑니다. 직관이 아니라 객관적 근거를 확인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태도가 전혀 다른 삶으로 안내합니다. 오늘도 인터넷과 유튜브에 차고 넘치는 정보들이 전달됩니다. 알고리즘이라는 현대인의 감옥에서 벗어나 조금 더 멀리서 전체를 바라보며 현재의 ‘나’를 살피는 일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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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세트 - 전3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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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위선자들이에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어요. 파충류 한 마리가 다른 파충류를 잡아먹는다 이겁니다. 만일 부친 살해가 없었다면, 모두들 화가 잔뜩 나서 툴툴거리며 흩어졌을 거예요……. 구경거리겠지! 〈빵과 구경거리!〉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물론 나도 좋은 사람은 아니죠. 어디 물을 가지고 계신 분 없습니까? 제발 물 좀 마시게 해주세요!”(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대우 역, 열린책들, 2009.12.20.)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선호하는 독자들의 성향을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스물여덟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고 쉰일곱에 셋째 아들을 떠나보낸 경험이 『죄와 벌』, 『지하로부터의 수기』,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 그의 작품에 직, 간접적으로 분명한 흔적을 남겼겠죠. 그러나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통해 소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부차적입니다. 소설의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주제 의식은 조금씩 달리 해석됩니다. 인간의 욕망과 심리에 대한 내밀한 탐구,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설명, 상속을 둘러싼 갈등과 충돌,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의 문제,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 등 무엇을 읽어내는지 개별 독자의 관심과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버지 표도르, 첫째 드리뜨리, 둘째 이반, 셋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쟈꼬프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형제들이지만 닮은 구석이 없고 각자 삶의 길이 다르죠. 서구의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이성의 힘과 공리주의를 강조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반발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쳤던 프랑스와즈 사강의 생각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우울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읽는 사람들 내내 답답하게 만들고 바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은 신의 섭리, 전통 윤리에 대한 도전과 반항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요. 오히려 니체에게 영향을 준 러시아 소설가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사회 변동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소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나 맥락과 상관없이 툭툭 던져지는 문장들 혹은 이반이 스메르쟈꼬프의 생각을 바꿔 놓은 장면들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이성적 합리주의와 니힐리즘의 영향을 받은 이반 역시 철학적 프로파간다, 즉 시대적 흐름과 유행처럼 번지는 사상에 동조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심리적 지배를 받은 스메르쟈꼬프의 부친 살해는 해석과 논쟁이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습니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법 앞에서’ 우화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 에피소드로 자유의 대가는 ‘빵과 기적’을 주는 권위에 복종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은 고뇌하는 소크라테스형 인간이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원하는 인간형이겠으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오히려 작은 이익과 안전한 미래, 물질적 풍요 앞에서 생각보다 많은, 아니 거의 모든 걸 포기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자기 PR용으로 남긴 저작 『프로파간다』가 새삼스럽게 읽힙니다. 인간의 욕망과 집단 동조, 권위에 복종하는 오류가 겹쳐 정치적 선전선동 못지않게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환상과 유토피아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베이컨을 팔기 위해 의사를 동원하고, 젊고 예쁜 여성들에게 담배를 물려 선전하는 전략이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예인과 인플루서언서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대중의 선호와 호기심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세상이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명품백과 수퍼카를 떠올릴 필요도 없고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를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아 놀랍기만 합니다. 속고 속이는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자유의지라는 착각에 대한 성찰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은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겠죠.

러시아의 푸틴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인지,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모스크바 상황을 들려주신 분,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라고 선언했던 조지오웰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아트페어를 통해 관람객과 그림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신 분, 문화예술 전공으로 전시 기획이나 그림에 대해 진로 고민을 하시는 분 등 어느 때보다 ‘프로파간다’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던 모임이었습니다. 토스토옙스키를 옆집 남편의 입장에서 둘째 부인 이야기와 곁들여 평가하는 수다도 즐거웠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매번 다양한 반응을 들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인공지능이 전해주는 정보들, 입맛에 맞는 답변들, 그 알고리즘 뒤에서 조종 가능한 프로파간다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고민과 경계 대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자본주의와 욕망’을 주제로 한 세 번의 모임이 끝났습니다. 이제 ‘민주주의와 일상’을 주제로 여섯 권의 책을 만날 차례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역, 연암서가,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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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1 -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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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_체 게바라, 65년 3월 쿠바를 떠나며,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26쪽

아주 먼 옛날 스페인에 살았을지도 모를 돈 끼호떼를 다시 만났다. 아니, 어쩌면 그의 전부를 오롯이 들여다보는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질 무렵에 읽는 돈 끼호떼는 이전의 그와 현재의 그가 다르다. 아니, 소설 속의 그가 변한 게 아니라 현실 속의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비현실적인 몽상가, 환상적인 모험가, 반미치광이 부적응자...그를 뭐라 부르든 중년의 나이에 길을 떠나는 돈 끼호떼는 거울 속의 나, 혹은 곧 도래할 독자의 미래여도 좋다. 꿈꾸지 않는 자의 하루는 허망하며, 오늘이 전부인 사람의 일상은 무기력하다.

420여 년 전 미겔 데 세르반떼스가 그려낸 돈 끼호떼는 누굴 닮았든, 무엇을 풍자했든 지구 반대편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많이 낯설다.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고 언어유희를 즐기는 그는 왜 여전히 회자되는가. 1,500쪽이 넘는 두 권의 소설을 읽는 동안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문장에 낄낄거리다 해가 저물었다. 겨우 풍차를 향해 긴 창을 들고 돌진하던 모습만 기억하는 내게 완역판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였다. 액자식 구성으로 수많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즉 전설, 신화, 민담이 뒤섞여 『천일야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안셀모-까밀라-로따리오’, ‘레오넬라 이야기’ 등은 스토리 텔링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친숙하지만 낯설다. 떠나고 머물고, 다시 돌아와 몸을 추스리고 또 떠나는 돈 끼호떼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스꽝스럽고 한심해 보이기는커녕 그 처절한 몸짓들이 애처롭게 읽혔다. 힘에 부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안 될 걸 알면서도 명분과 대의 앞에 당당한 태도가 슬프게 보이는 건 순전히 내 탓일 게다.

조반니 보카지오의 『데카메론』(1350년 경), 앙투안 갈랑의 프랑스판(1714) 『천일야화』(8세기~16세기경)와 더불어 유럽 문학의 기원이 된 소설 『돈 끼호떼』는 아이들이 읽을 만한 소설이 아니다. 기사 작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놓인 방랑 기사 돈 끼호떼는 양심 있는 엘리트 지식인의 광기를 보여주는 맹목적 이상주의자이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지성이다. 또한 젊음과 사랑과 열정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낭만적 로맨티스트다. 지천명에 이으러 깨달음을 얻은 중년의 꼰대 돈 끼호떼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대책 없는 어른이다. 2권 마지막 부분에 죽는 날까지 동양의 어느 왕국에 가 사서 왕이 되거나 대학 총장이 될지 모른다는 꿈을 가진 돈 끼호떼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관성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돈 끼호떼는 쉼 없이 도전하고 현실 극복 의지가 뚜렷하다. 예측을 벗어난 말과 행동은 웃음을 유발한다. 상상력과 창조성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시도들, 그 과정과 노력으로 인간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대신 누적된 시간의 힘을 확인하며 생의 비의를 어렴풋이 깨닫는 법이다. 돈 끼호떼 곁에서 한결같이 그 허물을 덮어주고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는 산초 빤사는 조연이 아니라 돈 끼호떼의 동반자다. 두 사람이 빚어내는 콤비플레이는 미겔 데 세르반떼스 유머의 백미다. 마술적 사실주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원조라고 해도 손색없는 이 오래된 소설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타인과 세상을 향한 ‘태도’를 점검하게 된다. 인생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면 그들이 내게 보여준 표정, 내가 그들을 향한 행동이 떠오른다.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걸어왔든 돌아보면 이미 날이 저물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아마 중년의 돈 끼호떼 아재도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1권 52장, 2권 7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작과 공작 부인, 10일간 바라따리아 섬의 총독으로 일하는 산초 빤사 외에도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해낸다. 서사를 따라가며 전체 구성을 이해하고 위기와 절정을 지나며 결말에 이르는 현대 소설을 기대해선 안된다. 말과 당나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자. 돈 끼호떼와 산초는 만담 수준의 말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아재 개그의 원조라 할만큼 속담 주고받기, 다양한 언어 유희가 계속 된다. 파편적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되지만 돈 끼호떼의 강렬한 캐릭터는 변치 않고 독자들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오뒷세이아』처럼 고향으로 귀환하는 원점 회귀형, 여로형 구성은 특별할 것도 없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 법이 아닌가. 또한 방랑기사에서 ‘목동’이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려는 홀든 콜필드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깨달음’을 얻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알론소 끼하노라는 자기를 확인하는 기나긴 여정에 불과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반성과 후회가 곧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변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닌지 싶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각자 전혀 다른 무언가를 길어 올린다. 스토리와 허명을 가리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16세기 스페인 라 만차의 돈 끼호떼가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를 사랑한 이야기로 읽으면 어떤가.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 정찬우와 김태균의 컬투를 떠올려도 상관없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책 없는 아재의 나이브함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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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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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 왔다. - 29쪽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은 더더욱 그렇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타자화하는 습성은 본능에 가깝다. 친밀감, 유대감, 관계 양상에 따라 역할극이 바뀔 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주체적 삶에 대한 절대 고독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타인과 달리 ‘타자’는 사르트르의 ‘대자’,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와 같이 사유 주체 너머의 존재를 의미한다. 일상적 용어든, 철학적 개념이든, 타인이든 타자든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대개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각자의 일상과 미래가 읽기의 바탕이라면 모든 텍스트가, 단어와 개념과 문장이 존재의 주위를 맴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작가 토니 모리슨은 세계 인식의 출발을 차별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감각적 차이, 본능적 공포와 다른 사회적 질서와 규범 혹은 암묵적 시선과 태도의 문제로 연결된다. 드러내고 헤집어 본질을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소설가의 일이라면 토니 모리슨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일반화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지역과 국경과 피부색을 넘어 개별 독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네 안의 상처와 고통, 열등감과 차별적 경험으로 치환하라고 소리친다. 유대인, 흑인, 아랍인 등 주체만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문제의식은 계속해서 변형된 채 갈등의 여지를 남긴다.

텍스트 힙으로 2030 세대가 책과 독서 모임을 인스타로 소비하든, 지적 허영으로 가득한 욕구를 충족하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든 전국 방방곡곡 세계 도처에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언제 어디서 어떤 책을 앞에 놓고 토론이 이어지든 너무나 익숙한, 그러나 대안과 방법을 찾기 힘든 주제는 반복된다. 타인의 기원이 그리스 로마 시대 노예에서 출발했거나 농경 사회 이후 저장과 축적으로 사유재산이 가능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상관없이 구별이 아닌 차별화 전략은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비관적 전망은 지극히 개인적 견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제도와 규범, 교육과 지향점은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데 방점이 찍혀야 한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서로 다른 주장, 각자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일반론은 최소한의 기준과 합의된 질서 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언제부터 강남역 사거리가 태극기 물결로 뒤덮였는지 알 수 없다. 표현의 자유, 정치적 신념은 무제한 보장될 수 없다. 여전히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대한민국을 토니 모리슨의 증조 할머니 시대과 비교하면 지나칠까. 어쩌면 우리 안에 파시즘, 자기 안의 선량한 차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싶다. 마사 C.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이 토니 모리슨의 소설보다 추상적이지만 철학적, 현실적 측면에서 직관적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한 ‘이디오진크라지’와 고든 올포트의 『편견』이 타인의 기원을 설명할 수는 없으나 타자화의 본능과 대책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누군가 마들렌처럼 과거를 소환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는 누구와 함께 앉아있었는지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다. 남은 시간 동안 또 어떤 책과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책과 사람, 삶과 이야기가 허공 중에 떠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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