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돈 끼호떼 1 -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_체 게바라, 65년 3월 쿠바를 떠나며,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26쪽
아주 먼 옛날 스페인에 살았을지도 모를 돈 끼호떼를 다시 만났다. 아니, 어쩌면 그의 전부를 오롯이 들여다보는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게 두려워질 무렵에 읽는 돈 끼호떼는 이전의 그와 현재의 그가 다르다. 아니, 소설 속의 그가 변한 게 아니라 현실 속의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비현실적인 몽상가, 환상적인 모험가, 반미치광이 부적응자...그를 뭐라 부르든 중년의 나이에 길을 떠나는 돈 끼호떼는 거울 속의 나, 혹은 곧 도래할 독자의 미래여도 좋다. 꿈꾸지 않는 자의 하루는 허망하며, 오늘이 전부인 사람의 일상은 무기력하다.
420여 년 전 미겔 데 세르반떼스가 그려낸 돈 끼호떼는 누굴 닮았든, 무엇을 풍자했든 지구 반대편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많이 낯설다.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고 언어유희를 즐기는 그는 왜 여전히 회자되는가. 1,500쪽이 넘는 두 권의 소설을 읽는 동안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문장에 낄낄거리다 해가 저물었다. 겨우 풍차를 향해 긴 창을 들고 돌진하던 모습만 기억하는 내게 완역판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였다. 액자식 구성으로 수많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즉 전설, 신화, 민담이 뒤섞여 『천일야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안셀모-까밀라-로따리오’, ‘레오넬라 이야기’ 등은 스토리 텔링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친숙하지만 낯설다. 떠나고 머물고, 다시 돌아와 몸을 추스리고 또 떠나는 돈 끼호떼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우스꽝스럽고 한심해 보이기는커녕 그 처절한 몸짓들이 애처롭게 읽혔다. 힘에 부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안 될 걸 알면서도 명분과 대의 앞에 당당한 태도가 슬프게 보이는 건 순전히 내 탓일 게다.
조반니 보카지오의 『데카메론』(1350년 경), 앙투안 갈랑의 프랑스판(1714) 『천일야화』(8세기~16세기경)와 더불어 유럽 문학의 기원이 된 소설 『돈 끼호떼』는 아이들이 읽을 만한 소설이 아니다. 기사 작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놓인 방랑 기사 돈 끼호떼는 양심 있는 엘리트 지식인의 광기를 보여주는 맹목적 이상주의자이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지성이다. 또한 젊음과 사랑과 열정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낭만적 로맨티스트다. 지천명에 이으러 깨달음을 얻은 중년의 꼰대 돈 끼호떼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대책 없는 어른이다. 2권 마지막 부분에 죽는 날까지 동양의 어느 왕국에 가 사서 왕이 되거나 대학 총장이 될지 모른다는 꿈을 가진 돈 끼호떼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관성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돈 끼호떼는 쉼 없이 도전하고 현실 극복 의지가 뚜렷하다. 예측을 벗어난 말과 행동은 웃음을 유발한다. 상상력과 창조성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로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시도들, 그 과정과 노력으로 인간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대신 누적된 시간의 힘을 확인하며 생의 비의를 어렴풋이 깨닫는 법이다. 돈 끼호떼 곁에서 한결같이 그 허물을 덮어주고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는 산초 빤사는 조연이 아니라 돈 끼호떼의 동반자다. 두 사람이 빚어내는 콤비플레이는 미겔 데 세르반떼스 유머의 백미다. 마술적 사실주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원조라고 해도 손색없는 이 오래된 소설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타인과 세상을 향한 ‘태도’를 점검하게 된다. 인생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면 그들이 내게 보여준 표정, 내가 그들을 향한 행동이 떠오른다.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걸어왔든 돌아보면 이미 날이 저물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아마 중년의 돈 끼호떼 아재도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1권 52장, 2권 7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작과 공작 부인, 10일간 바라따리아 섬의 총독으로 일하는 산초 빤사 외에도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해낸다. 서사를 따라가며 전체 구성을 이해하고 위기와 절정을 지나며 결말에 이르는 현대 소설을 기대해선 안된다. 말과 당나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자. 돈 끼호떼와 산초는 만담 수준의 말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아재 개그의 원조라 할만큼 속담 주고받기, 다양한 언어 유희가 계속 된다. 파편적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열되지만 돈 끼호떼의 강렬한 캐릭터는 변치 않고 독자들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오뒷세이아』처럼 고향으로 귀환하는 원점 회귀형, 여로형 구성은 특별할 것도 없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 법이 아닌가. 또한 방랑기사에서 ‘목동’이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려는 홀든 콜필드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깨달음’을 얻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알론소 끼하노라는 자기를 확인하는 기나긴 여정에 불과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반성과 후회가 곧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변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닌지 싶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각자 전혀 다른 무언가를 길어 올린다. 스토리와 허명을 가리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16세기 스페인 라 만차의 돈 끼호떼가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를 사랑한 이야기로 읽으면 어떤가. 장소팔과 고춘자의 만담, 정찬우와 김태균의 컬투를 떠올려도 상관없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책 없는 아재의 나이브함이 불편하지만 않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