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또 하나의 세계 -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
최준식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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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가 알의 껍데기를 까고 날아가듯이
우리도 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 날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형태(form)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하루도 죽음과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얻는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무덤을 향한 끊임없는 질주가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이 생의 끝자락 어디쯤엔가 놓여 있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 치부된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논쟁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들의 삶이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어떤 구루(영적스승)가 남긴 시 한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머지는 모두 주금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시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분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과 인식 저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깨달음이거나 죽음의 이쪽편인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다.

  서양의 연속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하는 것이며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 곁으로 떠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도구적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동양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죽음을 극도로 혐오한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승과 저승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전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불교나 유교적 관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는 일상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제공한다.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주된 관심은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NDE’에 두고 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우선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락사에서 존엄사까지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의 정확한 정의에서 죽음의 문제를 시작한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우리말에 ‘무섭다’는 대상이 존재할 때 사용하며, ‘두렵다’는 말은 대상을 알 수 없거나 특정 대상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죽은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결국 죽음에 대한 고찰이 지닌 의미가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죽음 뒤의 세계를 살펴보면 체외이탈과 어둔 공간 속의 터널 체험을 거쳐 빛의 존재를 만난다. 그리고 장벽을 만나게 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장벽 앞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지역과 종교, 인종과 성별, 연령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근사체험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과 레이먼드 무디, 퀴블러 로스 등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풀어주고 있다. 다양한 사례 수집과 수집된 자료 분석으로 통계를 내고 특징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죽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노력들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대한 작은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의학계와 종교계의 견해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약물에 의한 환각 작용 실험 등 근사체험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실험도 있었고 종교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근사체험을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근사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차분히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내가 동의하게 된 이유도 죽음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의 상실감에 대한 허무로 발전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죽음에 淪?깊이 고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권해볼만한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에게 물어보라.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슬처럼 사라져간 이슬이도 그 밝은 빛의 터널 속에서 평안하길 빌면서……


06052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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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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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오십육년간 하루 한끼 하다
절에 비 오는 낮은 궁금했을 것
눈 날리는 날은 더 적적해
친구 없어 몸이라도 굴리고 싶게

이 나라 청화
중이여, 우리에겐 그대가 있군
가장 깊은 곳에서 높은 그대
저 텅 빈 듯한 산중에
지금은 또 누가 삶을 견딜까

그의 창자는 아무리 날이 좋고
마음산 어두워도
하루 한끼만 받고 궁금했던
그대 작은 신발, 만지고 싶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들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때로 격렬하게, 혹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산사의 고요함처럼 맑은 정신을 길어 올리는 고즈넉함이 아니라 밋밋하고 특징없는 고요함이다. 울림은 적고 목소리는 낮다. ‘그대’가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느닷없는 대상과 목적없는 행위들은 다소 낯선 풍경들을 자아낸다. 앞으로 시집은 직접 보고 골라야겠다. 시인들의 허명 때문에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네거티브, 검판
김정환 시인에게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사진 찍어둘 것을
1980년대 초, 서울 살러 왔을 때
종로 3가에서 을지로 3가 사이
지하철공사장, 거대한 수로처럼 철기둥이 땅속으로
마구 들어가 박힌 대로(大路),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그 붉고 검은 흙들 진창들

흑백으로라도 웃는 둘을 잠시만 세워두었더라면

그 길로 곡예하듯
검판 보러 가던 여름과 겨울이 보고 싶진 않았을 것
기록만 있다면 벌레 먹어도 좋은 것
매미는 울어대고 오공(五共)시대 끝에서 타던 청계천
을지로는 3․1고가로 침침한
눈 펑펑 내리던 그 흑백의 길

내 횡경막 속에 묻힌 역사적인 그 길
지금 그 길, 대화와 수서로 영원한
휴가중, 도둑은 가버리고 늦은 화살만 날고 있는
한낮

그때 서른 무렵이었으니!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차라리 내게는 이런 류의 고요함과 아쉬움이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단순한 과거 회상의 시점이 아니라 현재와 대비되는 지나간 시간의 ‘진창들’이 손끝에 전해진다.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허우적거림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 정밀한 풍경 묘사만으로도 나는 한껏 시인의 서른 무렵을 돌아본 느낌이다. 한 편의 시가 전해주는 울림이 무엇일까?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없어도 언어와 감각, 의미와 상상력을 통해 길어 올린 표상들이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치의 눈

하느님이 처음 만들 때 눈빛과
손길이 보인다

잘 접혀진 파란 풀잎
울지 못하는 풀의 울음을 대신한다
나는,
가급적 날지 않으려는 너를 눈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나는
원래의 풀잎에 다시 놓아둔다
울어도 찍히지 않는 울음 때문에

여치,
풀잎 줄기 실뼈의 섬유질 속에
통곡이 파란, 가을을
나는 혼자
눈으로 접고 또 접고 있다

슴벅한 눈길에
스스로 놀라 푸르르 날아가리라

아니면 이렇게 관찰된 대상을 통한 주관적 개입이 바람직하다. 철저한 객관화 아니면 감정의 떨림을 전달받고 싶다. 그 많은 대상과 상황들 속에서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신선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아름다움과 곱게 포장된 언어를 위해 시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060524-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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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음, 박경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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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제는 도시생활이 대부분이다. 농촌에는 60대 노인이 청년 회장을 한다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삶의 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과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농촌으로 갈 수 있을까?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능한 모든 발전들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었다. 세상은 진보와 발전의 수레바퀴 속에서 영속적인 진화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인류의 삶에 반성적 태도를 박탈했다. 현대의 미신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맹신은 인간의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발전되어 왔다.

  과학은 결국 가치 판단과는 무관한 기능만을 제공해왔다. 물론, 인문학과 예술과 종교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적절한 가치관을 제공했는가 하는 비판과 반성도 아울러야 한다. 이러한 판단과 논의는 인류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고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웬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는 이러한 논쟁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저자의 생각과 주장은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숭고함이다.

  현대과학의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와 산업주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비판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가 택한 방법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오성이 선택한 ‘한 놈만 팬다’는 전략이다. 그 한 놈으로 선택된 것이 에드워드 윌슨이다. 최재천과 장대익이 옮긴 <통섭>으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웬델 베리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거나 조목조목 반대의견을 비판하며 읽을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전반적인 그의 견해와 논의의 초점은 특별하지 않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반론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윌슨의 통섭은 한자로 ‘統攝’이다. 큰 줄기로 끌어 당긴다는 한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전제주의적 지배적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통섭의 주체가 과학이라는 데 있다. 웬델 베리가 윌슨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도 과학적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학문과 인접 분야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알 수 없는 세계는 없고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웬델 베리는 수용하지 못한다. 살아 있음의 신비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과학의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인식이 기독교적 관점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구체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이 왜 타당한지 조목조목 따져 밝히고 있고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없다. 오히려 신비주의와 모호한 태도로 보일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다만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맹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할 전제임을 반성하는 정도로 읽는다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학문간의 교류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발전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진보와 발전의 개념과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의 저자가 현대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삶의 방향과 목적도 없이 맹목적인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현대인을 위한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책 첫머리에 라이오넬 베스니(1946-1999)의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선언적으로 요약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당신이 보는 대로 세상은 당신에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당신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Blake, Complete Writings, Oxford, 1966, 663쪽) - P. 16


를 인용하며 삶의 예측 가능성과 기계적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 비판이 비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찰적 비판의 대안이 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과학의 대립이라는 관점은 아니지만 저자의 태도는 신비주의에 가깝다. 브레이크의 위대한 시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많은 책에서 인용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이 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 준다. 그래도 ‘삶은 기적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한알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Complete Writings, 431쪽) - P. 168


06052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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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역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6
알프레드 바알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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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었다. - P. 70

가장 감명 깊은 근대 축구에 대한 평가로 기억될 문장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근대 이후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스포츠는 이제 재미와 감동을 너머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스포츠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축구의 역사는 특별하다. 온 국민의 사랑과 열망이 녹아 있다는 섣부른 판단도 가능한 종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도 근대의 물결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졌고 매스 미디어의 보급과 함께 확산되었으며 대중적 관심을 불러 모았다. 동네 꼬맹이들까지 축구공 하나로 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의 전환은 축구를 ‘놀이’에서 ‘노동’으로 변화시켰다. 하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으로 바뀌어도 여전히 축구는 매력적이다. 현대의 축구는 자본과 결합되어 하나의 산업이 되어버렸지만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때때로 축구의 위기론이 퍼지고 관심이 멀어진 듯 하지만 월드컵이 열리는 해가 되면 온 국민의 관심은 마치 하나의 종교와 같은 위치에 까지 오르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영국 BBC가 한국에서 축구를 ‘종교’에 비유한 것은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다. 축구의 종주국에서 받게 된 평가는 긍정적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냄비처럼 끓어오르다가 월드컵이 끝나면 모두 축제의 한마당으로 여기고 돌아서는 태도가 재미있게 비칠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바야흐로 월드컵은 이제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무관심 속에 1904년 FIFA가 창립되었고 영국은 2년 후에 가입하게 된다. 우루과이에서 1930년 제 1 회 월드컵이 개최된 이후 축구는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는다. 내가 기억하는 월드컵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박창선이 월드컵 첫 골을 날렸고, 이탈리와의 경기에서 허정무, 최순호가 골을 터트렸다. 4년마다 흥분했고 현재도 재미있게 축구를 즐긴다. 월드컵의 역사는 100년도 안된다. 오히려 유럽의 컵대회가 훨씬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하다. 다만 지역적 특성과 연고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게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축구조차도 유럽과 서양 중심이다. 물론 축구 선진국 남미를 빼놓을수는 없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중 하나인 <축구의 역사>는 사진과 그림등 시각 자료와 함께 축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축구의 시작과 발전 근대 축구의 스포츠 외적 목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전체를 조망하는데 편리하다. 물론 짧은 분량으로 깊이는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부록처럼 붙어 있는 ‘기록과 증언’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생생한 기록들이 실려 있어 감동을 전해준다.

축구는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이제는 자본과 결합되어 거대 산업이 되어버렸다. 목적과 의도, 시각의 올바른 수정을 위해서라도 축구를 바로 보고 즐길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축구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다. 축제는 즐기면 된다. 이제 축구의 문화사를 더듬어 봐야겠다. 오늘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내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치르는 날이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그들의 땀과 열정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자본도 이데올로기도 잠시 잊고 축구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갖는 것은 맹목적인 축구 사랑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냄비 근성도 아닌 생활의 즐거움이다. 흥분하지 말고 즐기는 축구가 될 수 있기를.


060526-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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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90
이은호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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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축구는 다른 대륙에 비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별한 의미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사회 문화적 관점을 말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축구가 국가별로, 리그별로 독특한 색채와 나름의 경기 방식에 따라 운영되면서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탈리아의 세리에 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독일의 분데스리가,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세계 4대 리그로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모두 이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국의 선수를 응원하고 가장 수준 높은 경기를 관람하는 두 가지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한국의 K-리그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의미는 아주 미미하다. 지역 연고를 통해 프로구단들이 자리 잡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먼저 시작한 프로야구와 연고가 겹치기도 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스포츠의 관중이 겹치는 문제도 있다. 어쨌든 2002 월드컵 이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집단 광기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큼 열광적이다. 부분적인 열광이 전체의 축제로 확산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고 장점일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이제 축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재미가 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유럽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역사이고 문화이다. 영국과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의 프로 리그는 깊은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서로 경쟁적 발전 관계에 있다. 챔피언스리그나 각종 컵대회에서 자국의 이익과 애국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클럽의 명예와 지역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발판으로 성장한 리그는 끊임없는 경쟁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축구를 진화시키고 있다. 이 리그들의 운영 방식과 특징들은 물론 그 나라의 특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거대 자본과 결합되어 커다란 산업이 되어버린 지금 이 클럽들은 리그를 대표하는 하나의 팀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을 연상시킨다.

‘CU@K리그’라는 문구를 창안했던 붉은 악마 출신의 이은호가 쓴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명 리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라이벌 팀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레인저스와 셀틱, 로쏘네리와 네라주리, AC 밀란과 인터밀란, 아스날과 토튼햄, 마르세이즈와 파리지엥, OM와 PSG 가 그것이다. 유럽의 명문 클럽이면서 라이벌 팀인 이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 때문에 라이벌이 되었고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종교, 인종 등 축구 이외의 정치적 요소와 지역간의 갈등 등 복합적 문제들이 겹쳐져 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 벌어질 수 있는 많은 갈등과 모순들이 축구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축구는, 특히 열광하는 관중들은 선수들의 몸놀림과 경기 자체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미들을 읽어내게 된다.

한국 대표팀을 이끄는 아드보카트 감독이 글래스고 레인저스에서 5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어 그곳으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도 궁금하다. 개신교냐 카톨릭이냐 그것부터 묻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궁금하겠다. 바람직하지 않은 전통은 없어져야 하겠지만 쌓여온 시간과 역사를 하루 아침에 청산하는 것은 하늘의 색깔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축축한 공기만큼 땀냄새가 그립다.

미친 듯이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본지가 얼마나 되었나?


060529-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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