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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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아름다움은 나를 멸시한다』 수록)은 아니었고...윤대녕의 단편이었나? 기억나지 않는다.(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밀어주고 그 반작용으로 춥고 어둡고 아득한 먼 우주로 하염없이 멀어지는 우주인. 그 인상적인 장면이 어느 단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드』를 읽을 때도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그 우주인은 아직도 멀어지고 있을까, 언제까지 멀어지다가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까, 우주 공간에 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간의 끝이 없다면 시간도 영원할까,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실제 그 순간이 온다는 말인가.

우주의 기원, 세상의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혹시 무의식에 남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를 읽을 때의 개인적 감동은 오롯이 상상력에 기반한 나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의 시선은 실제계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향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도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우주와 생명을 포함한 세상의 기원과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철학과 문학적 소양은 일반인에게 적절한 설명 도구로 유용할 뿐 아니라 결국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웅변처럼 들렸다. 안다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죽음에 닿아 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사후 세계의 믿음이나 내세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시간이 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타인의 삶, 지구의 종말, 우주의 끝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이어지며 일요일 밤 3시간이 넘도록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 호기심으로 얻은 얇은 지식과 생각들은 어떤 태도로 현실에 반영되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명쾌하고 분명한, 논란이 없는 수학과 과학도 환원주의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거시 세계의 인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매일 묻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적응과 실용적 자기계발식 금언이 아니다. 어차피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필연을 가장한 존재와 관계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 의지의 표상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지 ‘먼지같은 존재’인지 논쟁을 하다가 ‘위대한 먼지’로 타협했다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위대한 먼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크린 속에 이미 펼쳐져 있든,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든, 연쇄적인 반응의 결과이든 상관없다.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인간의 삶은 바늘로 찍은 점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정도만 자각할 수 있어도 충분하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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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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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이나 행복한 가정의 공통점과 불행한 가정의 다양성을 간파한 톨스토이만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글은 행간에 숨은 의미를 애써 찾으려는 헛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막힌 프랑스 국경 앞에서 절망했던 발터 벤야민과 브라질에서 자살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음을 헤아릴 방법은 없다. 어차피 타인의 고통은 추론적 감상에 불과할 테니.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쓴 아홉 편의 글은 아이러니하게도 온기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고통스런 현실이 배제될 수고 절망하지 않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는 어설픈 결론에 도달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무너진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오늘의 대한민국과 비교한다. 또 다른 방식의 반지성과 무논리와 비이성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이념과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다. 경청과 소통의 부재가 폭력을 양산했던 유럽의 그때 그 시절을 닮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에밀 시오랑의 오래된 금언을 반복하며 기다리면 될까. 어두울 때에야 보이든 것들이 있다는 걸 슈테판 츠바이크가 아니면 모를까. 우리는 새벽에,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니, 낮과 밝음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걸까.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시대를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사랑 혹은 신의 이름으로 현실은 견디며 살아간다. 희망이 고문이 아니었던 시대가 있었을까.

누군가는 니힐리즘으로 누군가는 실용주의로 ‘지금-여기’를 견디라고 충고한다. 1940년에 쓴 몇 편의 글이 주는 교훈 혹은 감동이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믿음 이외에 오늘과 내일을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을까. 지구 반대편까지 기나긴 여정을 겪으며 슈테판 츠바이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특별하지는 않다. 어쩌면 수없이 반복되었거나 새로울 것 없는 삶의 지혜들이다. 누구나 알고 있어도 아무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

아주 얇은 책, 적은 분량에 그림을 곁들여 부담을 덜고 읽는 호사를 느끼게 해주기 좋은 도구. 읽는 사람이 특별한 게 아니라 어두울 때에야 무언가 보이는 눈을 뜨게 해주는 텍스트의 행간에 머무는 시간이 중요하다. 하늘이 맑고 푸르고 누군가의 생이 마감되어도 또 누군가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떠난 자가 남긴 기록은 과거를 소환하는 대신 현실을 톺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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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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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유행가는 시간을 반추하는 대신 낡은 현재를 반증한다. 아직도 계급이냐고 묻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이 아니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사회적 화두가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 어느 시대에나 평등한 세상을 외쳤지만 누구도 그런 세상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향해 인류는 쉼 없이 달려온 게 아닐까. 가깝게는 정치체제와 경제 제도의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진 유럽의 사민주의와 북유럽의 복지 모델, 전세계로 파급된 68운동,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등은 현실의 세세한 결을 만들고 켜켜이 쌓인 상식의 토대를 이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영화 《프라하의 봄》이 아니어도 급진적 사회 변동으로 인한 파급 효과를 우리는 온몸으로 겪으며 살고 있다. 6.25전쟁의 후폭풍을 경험한 세대가 생존해 있으며 5.16과 10.26과 12.12를 거쳐 5.18과 6.29를 기억하며 1997년 IMF의 후유증이 남아 있다. 21세기 들어서도 2008년 금융위기를 거쳐 2017년 박근혜를 탄핵한 후에도 비상계엄의 시대를 맞이했다. 끝날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말은 야구 경기가 아니라 인류의 삶에 대한 경고처럼 떠오른다.

다시, ‘생존’이 시대정신으로 평가될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1979년 출간된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은1996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온 한국사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층 갈등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장하성이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듯 미국보다 지독하고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취향’ 따위로 구별짓는다는 발상은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취향에 대한 사회적 비판, 실천의 경제, 계급의 취향과 생활양식 등 3부로 나눠 설명하는 흙수저 피에르 부르디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듯하다.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욕망은 성찰과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빌파리지, 게르망트,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 출입 가능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문화귀족’의 사례가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문화자본은 가정에서 ‘상속’되거나 학교에서 ‘획득’된다. 공화정이 실시되면서 보편적 공교육이 자리 잡은 이후에도 차별적 교육은 상존한다. 귀족학교는 ‘학비’로 판명된다. 국제학교, 사립학교 등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노는 물이 다른 현대판 귀족은 사회관계 자본을 대물림하며 끼리끼리 논다. 경제자본이 학력자본과 문화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2025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상징 투쟁으로서 ‘차별화의 감각’을 익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들고 타고 사는 곳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네트워크 시대는 구별짓기가 공고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신분질서가 무너진 근대 이후 현대인의 삶은 경제자본으로 거의 모든 게 ‘구별’ 지어진다. 이런 현실에 대한 평가와 대응방식을 개인의 태도로 환원할 수 없다. 삶의 목표와 가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철학의 빈곤은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생활양식은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에 시간축(통시적 관점)이 더해져 입체적으로 살아 숨쉰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오늘-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취향’, 즉 문화는 구별하고 차별한다. 문화는 섬세한 상징폭력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실은 사회학 이론보다 차갑고 단단하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쳐 사회변동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계급 이익과 무관한 이념 투쟁과 진영 논리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무지성의 시대를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수많은 개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고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정치적 대증요법 앞에서 길을 잃는 위정자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래도 봄은 오고 우리는 현실을 살아낼 것이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처럼.

*사족 : 20년 넘게 개역판을 내지 않고 책값만 내는 출판사와 조각 초역으로 완성한 번역자의 무책임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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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82
레온 페스팅거 지음, 김창대 옮김 / 나남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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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부조화 이론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심리적으로 불일치하는 두 개의 인지 요소(아이디어, 생각, 믿음 등)가 사람들에게 있을 때 부조화가 발생하며, 사람들은 행동이나 인지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인지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부조화를 감소시키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1957년, 레온 페스팅거는 주장은 이전에 보상과 강화로 인해 인간의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강화이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노력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은 어떤가.

범죄자가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정치인들이나 처벌받지 않은 권력자도 마찬가지다. 이는 신포도 기제나 달콤한 레몬 기제와 같은 합리화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레온 페스팅거는 비일관성inconsistency 대신 논리학적 의미가 덜한 부조화dissonance,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용어 대신에 중립적 용어인 조화consonance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를 설명한다. 부조화 이론의 기본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부조화의 존재는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부조화를 감소시켜 조화를 달성하려는 동기를 유발할 것이다.

(2) 부조화가 발생하면 그것을 감소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부조화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나 정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고자 할 것이다.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것은 마치 배고픔이 배고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부조화의 감소를 지향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선행조건으로 볼 수 있다.(20쪽) 부조화가 조화를 지향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인지부조화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론이 성립하지 않거나 틀린 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합리적 판단, 논리적 과정을 비난하기 쉽다.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이 틀렸거나, 세상이 글러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화는 모든 인간의 내면적 평화를 가져오지만 옳고 그름이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건 아니다.

심리학의 제반 영역들이 경제학, 법학, 철학, 정치학, 인류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답을 주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 년에 불과하다. 최근 뇌과학의 발달로 인체의 마지막 신비가 밝혀지는 듯하다. 모든 게 유전자 혹은 호르몬 탓이라는 농담과 함께 진화 생물학과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나’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그 근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다시 한번 살폈다. 다양한 실험을 담은 논문을 정리한 이 책은 사회심리학 분야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웠다. 타인을 향한 자신의 태도와 감정 조절, 행동의 동기와 추동력은 오로지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유의 시간 대신 페스팅거의 주장에 귀 기울여봐도 좋겠다.

당신, 아니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 인간은 일관성 있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 어차피 모순된 말과 행동과 감정에 허우적거린다. 그 과정에서 겪는 내적 고통과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배울 필요가 없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존재인 개인은 마음의 평화와 안정, 자존심과 인정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가 아름답고 행복하게 태어난다고 믿던 시절은 행복했을까.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여섯 살 아이의 눈과 다섯 살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으니 각자 자기 위로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대는 대신 인지부조화 극복에 골몰하는 건 아닐까.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은 치유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누구나 겪는 삶의 전제 조건이다. 자유를 누리며 불안이라는 세금을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 곁에 없어 고통스러운 외로움과 달리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고독을 즐길 수 없다면 홀로 선 단독자로 살 수 없다. 한 인간의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는 없으나 사람 다 거기서 거리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심리적 태도와 본능적 욕망을 알고 대처하는 방식과 태도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무엇이 옳은가, 더 나은 것은 어떤 것인가, 보다 중요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한 어떤 외부적 시선과 조건으로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즐거운 일상이 언제 어떻게 슬픔과 고통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지옥은 어딘가 구멍을 파고 기다리는 함정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영혼의 감옥일 뿐이다. 하루를 견뎌 내일을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타인과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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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 김서영의 치유하는 영화읽기 일상인문학 2
김서영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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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현상은 무관할까. 대한민국 감독 중 유일하게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김기덕의 영화는 감독의 삶과 분리될 수 있을까. 2007년 초판이 나왔고 2014년 개정판을 읽었다. 그리고 독서 모임 현장에서 책 두께를 비교하며 목차를 비교했고, 김기덕과 봉준호의 영화 등 무려 90쪽이 삭제된 또 다른 2021년 판본을 확인했다. 17년간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져 코로나로 객사했으며 한 명은 흥행과 작품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감독으로 성장했다. 김서영의 평가는 현실과 상반됐고, 개정판을 거쳐 사라진 텍스트 안에서만 숨 쉬고 있을 터. 물론 모임에서는 두 감독에 대한 평가나 영화 이야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감각이다. 주체적으로 보고 듣는 행위와 구별된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보고 듣는 것이 다르다. 같은 코스를 여행해도 전혀 다른 걸 보고 듣고 맛보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제각각 흐르며 정서적 반응을 통해 이성을 뒤흔들기도 한다.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분석은 그래서 때때로 공허하다.

모임 전 《조커 2》를 함께 보았다. 고담시의 어둠과 음산한 분위기를 압도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어떤 표현으로도 담아내지 못할 듯싶다. 한 배우의 존재감이 서사를 지배한다. 뮤지컬 형식에서 호흡을 맞춘 레이디 가가조차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느낌이다. 지나친 재능은 독이 되고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가 연기의 한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거나 뛰어넘는 영화를 만나기도 한다. 내용, 전개, 구성, 시각적 효과 등과 무관하게 조커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몇몇은 그 상처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으나 대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시간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은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나’의 지금-여기다. 상징계에 머물며 상상계를 살지만 실재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여전히 현실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충족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구이거나 실현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꿈꿀 자유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물론 조커를 보며 공감과 몰입을 하는 관객도, 안도와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영화, 다른 생각들이 결국 라캉이 말한 주이상스를 확인하는 방법이 아닐까.

김서영은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자 도구다. 프로이트와 융, 라캉과 지젝을 앞세워 정신분석과 분석심리, 히스테리와 강박을 설명하고 상징계와 상상계와 실재계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쓰지만 그 개념조차 생소한 독자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은 존중되어야 마땅하고 각각의 관점과 준거 틀이 충돌하는 지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지만, 영화를 ‘재미와 감동’ 이외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겐 시집 뒤에 붙은 해설, 소설 뒤에 붙은 비평만큼 헛되고 헛될 수도 있다.

지나간 영화를 떠올리며, 새로운 영화를 소개받으며 인간의 ‘심리’에 대해 들여다보는 기간의 텍스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는 때때로 소설처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니까. 어떤 자세로 영화를 보든, 실존 인물이 아닌 영화 속 캐릭터에 몰입하든 돌아보는 건 결국 ‘나’와 관계들 그리고 현실과 미래일 테니까.

꿈의 조각을 항상 한 주머니에 넣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활의 어딘가에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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