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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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적 차이와 편향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엄밀한 제한 이론으로 외삽(外揷)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 79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던 숫자 세 개를 기억한다. 마치 노비문서처럼 따라다니던 IQ지수가 그것이다. 전교 1, 2등이었던 동생은 언제나 자신은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동생도 자신의 IQ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지능지수(IQ)는 비네 척도를 거쳐 1912년 독일의 심리학자 슈테른에 의해 탄생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지능을 8가지로 제시하지만 그의 분류법에 따르더라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중 일부만을 평가하는 편협한 시각이다. 다른 지능이나 영역에 대한 능력은 대학 입학 시험이나 객관화할 수 있는 각종 시험에서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물며 피부색과 인종에 따른 능력 차이는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각인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은 뿌리 깊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이 책은 역사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요 주제, 즉 지능을 하나의 양()으로 측정해서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은 외롭고 지루했으리라. 과학과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며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잘못되었다고 외쳐야했던 저자의 노력은 한 권의 위대한 저서를 남긴 것이다. 1981년에 나온 이 책은 우생학과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의 기원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얼만큼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관점에서 출발했는지, 잘못된 실험 결과와 통계의 주관적 조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지적하고 있다.

 

과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의 시대, 과학적 세계관이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법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규정과 질서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그것을 다루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얼마든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두려워졌다.

 

흑인과 인디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무모한 노력, 머리의 크기가 인간의 지능을 좌우한다는 폴 브로카의 전성시대, 미국의 발명품인 IQ 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수한 오류와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는데 저자는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권력자와 정치가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합리한 결정과 편견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확인 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 다수결은 아니다. 8:1이라고 해서 8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모여 의사결정을 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는 원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조직 내에서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지켜야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배제한 채 일부의 의견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다수를 호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면 과학을 앞세운 편견이 판을 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을 부정하며 혁신의 가치를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고 기본권을 억압하는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들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진심이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방법과 태도, 근원적인 바탕은 저마다 다르다. 니콜라스 카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인종적 편견이나 피부색, 종교, 출신 고향, 학벌, 국적이 아니라 인터넷이 놓여 있다.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꾼다는 저자의 주장은 체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두 가지다. ‘문자인터넷이다. 문자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인터넷이 얼마큼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수세기 동안 종이 인쇄물을 통해 이루어지던 개인적인 독서에 갇혀 고립되고 해체되어 있던 우리의 자아는, 부족 마을과 같은 전 지구적인 공동체로 통합되면서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 - 6

 

구글goole이 구골googol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0100제곱. 그 원대한 꿈과 희망이 이제 우주로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패턴 때문에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되고 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213)라는 새무엘 존슨의 말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일까.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네크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완곡한 저자의 비난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난이 아니라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현실과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나칠까.

생각한다는 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오늘 저녁 먹을 메뉴를 고르거나 어떤 핸드폰을 살까 생각하는 것만이 생각의 전부가 아니다. 생각하며 살자. 나부터. 생각하지 않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작은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다. 점점 더 빠르게 인테넷 환경을 숙명처럼 활용해야 하는 세대에게 책은 점점 멀어지고 스마트한 생각을 대신 해주는 폰은 언제나 장기의 일부처럼 손 끝에 매달려 있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책과 같은 문서를 읽을 때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뇌활동을 보여줌을 발견했다. 책을 읽는 이들은 언어, 기억, 시각적 처리 등과 관련된 전전두 부분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반면 숙련된 인터넷 사용자의 경우는 웹 페이지를 보고 검색할 때 이 전전두 부분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활성화를 나타냈다. -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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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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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은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배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모호한 심적 멜랑콜리가 아니라 대상을 명확히 밝혀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경건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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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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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도 아니고 북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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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책을 엄청 많이 읽으시는군요. 존경스럽네요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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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의 시작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프롤로그로 요약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말해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설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발적인 변화와 인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살아온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공감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낭만적 혁명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적 사랑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오히려 혁명을 비현실적 꿈의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 의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랑은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한 작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더운 여름 일요일 저녁 공원을 거닐 듯 가벼운 마음으로 치유 받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인문학적 산책의 동반자로 어울린다. 류동민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책 말미에 덧붙이듯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가리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김훈, 슬라보예 지젝, 홍상수의 <북촌방향>, 알랭 드 보통, 루이 알튀세르, 마오쩌뚱, 폴 스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하준이 그들이다. 폴 스위지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의 책들을 한 두 권씩 읽어보았고 <북촌방향>도 보았다고 해서 류동민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만 남겨지는 이 책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마르크스식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단기적인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6이라고 강조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과학적 논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6)라고 선언한다. 고개를 들고 문득 인문학적 상상력사회과학적 논리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떤 소통과 믿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위무되는 행위인지.

 

책을 쓰면서 책 읽기를 통해서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7)라는 말에 밑줄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그 배움의 의미 반대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서로 가 닿지 못할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 한 번째 테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았을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3)라고.

 

이 책의 구조는 --사회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관계 양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작동원리를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삶의 태도를 기웃거린다. 관계의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거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는 공산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와 자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엇갈림의 클리나멘이 때문이다. 저자는 클리나멘은 사물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엇갈림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78)라고 정리하지만 인과관계와 논리에서 벗어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또한 관계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과 권력의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힘이 배분되는가의 문제이지, 대상에 대한 절대적 힘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질투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 203

 

타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작동원리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노력은 게으른 자의 또다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모든 자유를 허락하라는 경구는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이미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229)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1인치의 논리도, 합리적 판단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 그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으려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 류동민과 함께 떠나는 마르크스식 자기 치유 산책 프로그램에 동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했던 여정, 즉 개인의 자기소외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을 분석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냉철함과는 다른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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