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141130-115~1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