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의 시작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프롤로그로 요약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말해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설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발적인 변화와 인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살아온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공감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낭만적 혁명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적 사랑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오히려 혁명을 비현실적 꿈의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 의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랑은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한 작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더운 여름 일요일 저녁 공원을 거닐 듯 가벼운 마음으로 치유 받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인문학적 산책의 동반자로 어울린다. 류동민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책 말미에 덧붙이듯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가리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김훈, 슬라보예 지젝, 홍상수의 <북촌방향>, 알랭 드 보통, 루이 알튀세르, 마오쩌뚱, 폴 스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하준이 그들이다. 폴 스위지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의 책들을 한 두 권씩 읽어보았고 <북촌방향>도 보았다고 해서 류동민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만 남겨지는 이 책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마르크스식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단기적인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6이라고 강조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과학적 논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6)라고 선언한다. 고개를 들고 문득 인문학적 상상력사회과학적 논리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떤 소통과 믿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위무되는 행위인지.

 

책을 쓰면서 책 읽기를 통해서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7)라는 말에 밑줄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그 배움의 의미 반대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서로 가 닿지 못할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 한 번째 테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았을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3)라고.

 

이 책의 구조는 --사회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관계 양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작동원리를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삶의 태도를 기웃거린다. 관계의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거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는 공산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와 자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엇갈림의 클리나멘이 때문이다. 저자는 클리나멘은 사물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엇갈림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78)라고 정리하지만 인과관계와 논리에서 벗어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또한 관계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과 권력의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힘이 배분되는가의 문제이지, 대상에 대한 절대적 힘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질투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 203

 

타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작동원리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노력은 게으른 자의 또다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모든 자유를 허락하라는 경구는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이미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229)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1인치의 논리도, 합리적 판단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 그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으려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 류동민과 함께 떠나는 마르크스식 자기 치유 산책 프로그램에 동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했던 여정, 즉 개인의 자기소외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을 분석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냉철함과는 다른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70

 

 

12062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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