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
디팩 초프라 지음, 최승자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의 부록으로 따라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디펙 초프라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곱가지 지혜>라는 짤막한 책은 출판사를 보니 <교양의 즐거움>을 주문할 때 따라온 것 같다. <성공에 이르는 영혼의 일곱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밀리언셀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어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그 일곱가지 법칙을 아이에게 적용시켜 보라는 자녀 양육법 지침서 내지 참고서다. 아주 친절하게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일별로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일곱가지 법칙이 아니라 칠십가지 법칙이 있어도 지침서를 참고해서 아이를 기르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를 진정한 성공으로 이끄는 선물’이라는 부체가 붙어있지만 ‘진정한 성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물질과 명예를 위한 성공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삶의 주체적 리더로서 영혼의 성공을 언급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모호하고 명상적인 언급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고 해서, 혹은 특별한 자녀 양육법을 안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제대로 커간다는 것에 전부 동의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모두 실천하지 않듯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차이가 나고 행한다고 해서 개체로서의 타인인 아이들이 모두 부모의 의도대로 자라주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봐주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아이들을 대하며 ‘권위와 억압’을 배제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모 정도만 돼도 성공한 부모라고 본다. 쉽지 않다. 부모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순간순간 아이에게 쇠뇌되고 반복적으로 주입시켜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길러진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 성공이 주는 삶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아이가 행복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잘 할 수 있고 즐거워하는지 고민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가 우선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아이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법칙(일요일) : 순수 잠재력의 법칙
“넌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해낼 수 있어.”

두 번째 법칙(월요일) : 베풂의 법칙
“뭔가 바란다면, 먼저 그대로 베풀어봐.”

세 번째 법칙(화요일) : 원인과 결과의 법칙
“지금 내리는 선택이 미래를 바꾼단다.”

네 번째 법칙(수요일) : 최소 노력의 법칙
“거부하지 말고 흐름을 따라가렴.”

다섯 번째 법칙(목요일) : 의지와 소망의 법칙
“진정으로 뭔가를 바랄 때마다 씨앗을 한 톨 심는 거야.”

여섯 번째(금요일) : 법칙 초연함의 법칙
“삶을 여행으로 즐겨봐.”

일곱 번째 법칙(토요일) : 목적의식의 법칙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란다.”

  책은 이렇게 일곱 가지 법칙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권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남는 건 별로 없다. 답답할 때 길이 없는 줄 알면서 찾아보기 위한 방법 정도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목이 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내용과 학교와는 무관하다. 뭔가 튀는 제목이어야 팔리나? 학교에서 뭘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걸어온 길을 자꾸만 뒤돌아본다. 내가 받았던 교육과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초, 중, 고를 거치면서 만났던 많은 선생님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학교교육을 추억하기도 한다. 학교는 지식 전달을 위한 교과 교육과정보다 잠재적 교육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공간이다. 그 시간과 공간들 사이에서 내가 배웠던 도덕과 윤리들을 떠올려본다.

  서울대학교에 국민윤리교육과가 1981년에 설립되었고 이후 전국 각 대학에 같은 학과가 개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국민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교육할 방법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국민윤리교육’을 위한 학과가 설립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 후 25년 흘렀고 전국도덕교사모임을 필두로 그간의 반성과 성찰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 김상봉 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저간에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책이다. 도덕 교사를 위한 강연과 도덕교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알고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면화되지 못화고 겉도는 이 도덕과 윤리에 대한 얄팍한 고민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한권의 책이 우리나라 도덕 교육 전반에 대한 대안과 모색의 결정판이 될 수는 없다. 김상봉이 밝히고 있듯이 각론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생산적인 공방은 어쩌면 도덕교사들, 혹은 학생들과 국민들 모두의 자각과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다만 거시적 안목에서 도덕교육의 목적과 철학적 측면의 성찰조차 없었던 지난날에 대한 비판과 뼈아픈 자각만으로도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어린 시절 시험을 보기 위해 암기했던 도덕적인 행동과 타인을 위한 배려들, 그리고 학력고사를 위해 달달 외웠던 서양의 철학자들의 이름과 한 줄로 요약해서 외웠던 그들의 사상이 윤리와 도덕의 전부였다. 제대로 된 교육이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교과별로 상이한 대답과 교육 목적이 제시될 테지만 도덕교과는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 노예가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노예적 삶이란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엄연한 시대정신이라 믿는다.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오직 착하게만 만들려는 것은 언제나 불온한 시도이다. - P. 13

  대한민국의 도덕교육의 문제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그 ‘불온한 시도’들에 대한 면면을 밝히는 작업이 이 책이 갖는 의의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확립된 ‘국민윤리교육과’의 전통과 맥락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그 시절 교수들에 의해 확립된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 도구로서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민족과 국가에 대한 맹목을 선전하고 내면화했던 도덕교육은 개인의 고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순종적이고 선량한 국민을 위한 교육은 이제 그만 가라. 갈등과 투쟁도 때로는 필요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선택을 위한 고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은 필요하다. 지금의 도덕교과는 학제 간 접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사회학과 심리학, 철학과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잡탕 찌개를 연상시키는 주장을 했던 어느 교수의 말처럼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을 어미학문으로 해서 도덕교육의 목적을 바로 세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 책은 전국의 도덕 교사를 위한 책이 아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교육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삶에 대한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있어야 도덕 교과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도 그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뇌사상태에 빠진 도덕교육에 대한 심각성을 외면한다면 아이들의 미래도 행복의 의미도 삶의 태도도 여전히 지금과 같을 것이다.

  저자는 “‘학교는 중요한 진실을 회피한다’(노암 촘스키, 강주헌 옮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2001, P. 38) 그 대신 학교는 국가가 승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입한다.”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계급재생산’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수많은 논의와 주장 속에는 여전 평준화 문제나 수월성 교육의 문제가 등장하고 기여 입학제나 특수 교육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주장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라고 본다. 무엇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좀 다른 방식으로 해 볼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도덕교육이 넓은 의미의 철학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신이 노예상태에 빠지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편협한 당파성에 빠지지 않고 모든 문제를 균형 잡힌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현실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완전성의 이념 아래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 203

  김상봉의 주장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일독을 권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다고 해서, 시간만 흘러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교훈이다. 오늘 하늘이 맑다고 해서 내일도 맑을 것이라는 맹목과 순종을 학교는 오늘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도덕이 이런 것은 아닌지.

  참된 도덕성은 소극적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을 돌보려는 마음에 존립한다. - P. 300


20051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
김수업 지음 / 나라말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국가주의, 특히 일제의 군국주의 지배 사상이 포함되어 있는 ‘국어’라는 말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한 명칭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략 12년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국어’를 배운다. 우리말에 익숙해지는 6, 7세가 지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한글을 배우고 보다 확장된 어휘와 문장들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문학 작품, 특히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석과 문학에 관한 단편적인 이론들, 그리고 글을 이해하기 위해 글의 종류와 특징들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단락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웠다. 더불어 5차 교육과정 까지는 교과서가 성전이었기 때문에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서 고전문학의 경우 고전 문법을 제2외국어보다 어렵게 공부했던 나쁜 기억이 있다. 결국 ‘국어’ 과목을 통해서 배운 것은 우리 겨레의 삶과 문화가 아니라 대학 진학을 위한 주요과목을 배운 것이다. 때가 늦었지만 ‘국어’와 ‘교육’이 합해진 ‘국어교육’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김수업 선생님의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은 여러 매체에 기고되었거나 강연을 위한 원고들을 모았다. 시기상 여러 해에 걸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밝히신대로 일목요연한 흐름을 잡아내기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일관된 문제의식과 타당한 주장들은 시간의 변화를 무색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풀지 못한 숙제들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국어교육학 교수들이나 현장의 교사들이 책임져야할 몫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공감하고 문제의식을 가져야할 내용들이다.

  현재 학급학교에서는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다. 학습자 위주, 선택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하지만 현실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역시 실패한 교육과정이다. 학교와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을 높이고 수요자 중심 교육을 지향하는 교육과정이 성공하려면 인적, 물적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 선행 조건인 것은 초등학생쯤 되면 알겠지만 색깔과 무늬가 화려한 교육과정을 선언한다고 해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 수와 전공 영역을 먼저 고려한 선택과목의 조정이나 전문 교실이 없는 수준별 수업은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김수업 선생님이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대로 8차에서는 국정 교과서 제도가 폐지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출판사와 학습지 회사들의 파이가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탄력적이고 능동적인 교사의 역할이 기대된다는 말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만든 <우리말 우리글>은 현장의 교사들에게 교과서와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 책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교육부 관리의 책상서랍에서가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서 정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에서는 우리말 교육의 거시적 목표와 방향만 설정하면 된다. 큰 틀이 정해졌다면 각 지역 교육청과 학교 현장에서는 아이들의 발달 수준과 지역 사회의 입말이 반영된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가능하다. 이것이 참된 우리말 교육이 아닐까 싶다.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웠던 모든 언어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표준어’ 교육에 대한 문제점은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낸다. 해방이후 일천한 ‘국어교육’의 역사와 학문으로서의 한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국어국문학’의 아류로서 ‘교육학’과 접목된 사생아 쯤으로 비춰지는 ‘국어교육학’에 대한 학문적 성격은 둘째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국어’를 가르치는 일과 그 일이 어떤 형식과 내용을 담아내야 할 것인가이다.

  결국 ‘국어교육의 바탕과 속살’은 우리 것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의 색안경을 벗어내고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필요한 우리 삶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우리말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탁상공론과 이상주의의 발로가 아닌 현실적 대안과 모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들이다. 현실적으로 대학입시에서 요구하는 객관식 시험 기계를 양산하는 국어교육에 비난을 보낼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필요한 시험과 제도를 고치고 바탕과 속살을 고민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관성의 법칙을 벗어나서 조금씩만 한발자국씩만 앞으로 걸어나가면 된다. 혁명적 변화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단순하게 현장의 교사들과 학생들의 요구, 교육 관료와 교육과정 편찬 과정의 고민이 하나 될 수 獵?밝은 미래는 그들이 아닌 우리가, 내가 만들어 것이다.


060411-0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