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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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 시선이 300권 기념 시집을 찍었다. 문학과지성사시인선 300호가 2005년에 나왔으니 4년쯤 차이가 나는 셈이다. 두 출판사의 시리즈는 우리 시단의 간판이다. 기념시선집은 창비시선 201부터 299까지 시집을 펴낸 시인들의 작품을 박형준과 이장욱이 골랐다. 어떤 시를 골랐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근 10년 세월동안 우리 시문학사의 변화와 흐름을 살펴본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이해해도 시는 시대를 반영한다. 시인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자리마다 다른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다. 아름답고 눈부신 언어로 때로는 슬프고 우울한 목소리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시인들의 시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숨구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시대를 초월하여 시는 사람 사는 풍경을 농밀하게 묘사한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 언어의 상상력은 감각적 이미지로 다가오는 여타 예술을 능가한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 규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혹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언어의 바다가 시詩다.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들 삶이 아닐까? 시인의 눈과 입을 빌어 우리는 생을 돌아보고 현재의 나를 확인하며 관계 맺고 있는 타인들을 생각한다. 잠시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시에 해답은 없다. 늘상 거기 있는 것은 고민과 좌절 그리고 치유되지 않는 상처뿐이다. 그 상처 보듬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신이 감춰둔 사랑 - 김승희

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산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결국 사람이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은 신이 주는 것이 아니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것은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심장처럼 사랑하는 일이다. 시대를 건너 세월이 흘러도 어떤 사랑이냐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고 있나?

포옹 - 정호승

뼈로 만든 낚싯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두 사람이 부부이든, 연인이든 그들의 부끄러움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사랑은 가장 내밀한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여전히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수많은 연인들에게 신석기 시대의 꼭 껴안은 남녀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화석이 될 만큼 사랑했던 그들의 사연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십년의 세월을 넘어 100권의 시집을 만들어 낸 시인들의 가슴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랑을 확인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이든 말이다. 얼마나 많은 시들을 읽어야 세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사춘기가 있었다. 그 소년은 시를 읽으며 늙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로 세상은 가득하기만 하다. 그래서 내일이 기다려지고 또, 오늘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090427-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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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4-28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브리핑을 보니 인식의 힘님 글이 좌르르 올라와 깜짝놀랐습니다. 얼마만인지... 다시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sceptic 2009-05-14 08:50   좋아요 0 | URL
이제야...ㅠ.ㅠ 저도 반갑습니다. 암튼 가끔씩 이러합니다.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2009-04-28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9-05-14 08:51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계시겠죠?

항상 건강하고 즐거운 일만 있는 인생이야 어디 있겠어요...
지독한 독감이 벌써 3주째...대단합니다...

아프지 마시구요...날씨만큼 화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