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믿고 남쪽 행을 포기했다. 예약을 취소하고 영화 한 편으로 위로하니 흐린 하늘이 한결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창가에 앉아 얇은 책 한 권을 꼼꼼하게 읽으며 간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바쁘고 해야 할 공부(?)와 욕심나는 책들은 여전히 늘어만 간다. 일종의 강박증이거나 또 하나의 벗어나기 힘든 욕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좀체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이렇게 마음 맞는 책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진지하면 더욱 그렇다. 강유원의 책은 예전에 김광석의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사서 읽는다. ‘래디컬’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이 나와 일치할 순 없겠지만 그의 생각과 공부 방법,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은 더 없이 매력적이다. 물론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점으로 그렇다. 친구가 없을 것 같은 그의 삶의 태도와 공부 방식은 의도적으로 언론을 기피하고 대인관계를 정리하는 강준만의 방식과는 또 다를 것이라고 짐작한다.

  스스로를 삼가고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독서와 강의를 통해 앎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공유하며 더불어 공부하는 그의 방식은 ‘공부’에 관한 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방식과 강유원의 태도는 여전히 도전하고 노력해야 하는 대상과 공간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없다는 말 같지 않은 핑계로 미루고 있지만 마음의 빚처럼 청산되지 않고 조금씩 더디지만 발걸음을 내딛뎌야 하지 않나 싶다.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시간은 없고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제대로 살기는 제대로 죽기보다 어렵다.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를 노트처럼 묶어 낸 책이다. 그러니 더없이 자유롭고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저자의 목소리는 생생하고 의도와 감정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하는 부분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올 상반기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많이 배운 책을 꼽는 다면 이 책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책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와 태도에 대해 이렇게 진지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고 성찰하게 해 준 책은 없었다. 다른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겠지만 나는 강유원의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공감하고 고민했으며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수박 껍데기만 핥아대는 책읽기에 대한 뼈아픈 충고와 고전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방법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강유원이 제시하는 방법이 최선을 아니겠지만 적어도 노력과 태도 면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더구나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그것들을 정리하고 공부를 마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일치되는 공통된 견해이다.

  ‘정치사상’이라는 주제로 묶어 놓은 책은 플라톤의 <국가>와 <정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통치론>이다. 이에 앞서 고전을 읽을 때 유념할 점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제목만 옮겨 보겠다. ‘오늘날 통용되는 분류 방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록매체나 편집 방식이 오늘날과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라. 저자 자신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본 개념을 철저하게 익혀라. 텍스트의 형식을 살펴라.’ 깊은 공부와 꼼꼼한 책읽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생각들이다. ‘정치사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거시적인 관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제 서양 고전을 통해 서양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화려한 말빨을 앞세우지도 대단한 이론도 없다. 그가 주장한 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얻어지는 이 놀라운 결과는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특별함이다. 책 자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능력과 노력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나는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지만 강유원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따진다면 반절도 읽지 못한 셈이 된다. 책을 읽고 정리하는 데 비법이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취하는 방식은 책을 읽고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많은 걸 얻었다. 제시한 방법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그대로 따라하기 힘들더라도 책을 보는 안목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제시한 몇 권의 책을 얻었고 로크의 <통치론>이 숙제로 남겨졌지만 2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얇은 책을 통해 두고두고 새겨야할 지침과 방법들을 배웠다.

  직접 강의를 듣지는 못했지만 이 시리즈는 계속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기다려진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50번 읽었다는 전설적인 공부 방법만으로 그를 존경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고전을 읽는 방법과 태도가 이러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나가면서 부끄러워졌다. 좀더 갈고 닦고 배로 노력할 일이다. 무릇 공부는 이제부터라고 믿는다. 마음을 닦고 몸을 닦고 뜻을 바로 세우고 영혼을 말게 하는 인문학 공부는 깨닫는 즐거움을 전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목적도 없고 끝도 알 수 없지만 묵묵히 걸어야 할 길이다.

  덧붙여 글쓰기 훈련에 대한 충고는 더더욱 깊이 새겨진다. 요약문 쓰기, 보고서 쓰기, 소논문 쓰기로 나누어 2장과 3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데 강유원만의 방식이 아니라 군살을 뺀 정확하고 잘 벼려진 칼날같은 글쓰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 보여주는 힘이 무엇인지 잘 소개되어 있으며 힘을 빼고 감상적이지 않으며 정확하게 쓰는 방식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갈 길은 바쁘고 공부해야 할 책은 넘쳐 난다. 그것이 무엇이든 왜 선택을 했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안 되는 공부를 선택한 강유원이나 그 강의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나 그의 책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나 같은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뜻이 통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진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꼭 이 책을 읽어야 한다.


080629-07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08-06-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쓰신 <몸으로하는 공부>의 리뷰를 읽고 저도 따라 읽었습니다. 참 기쁘고도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번 책도 여력이 닿는대로 따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리뷰에 대한 감사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Thanks To밖에 없어 몇자 남겼습니다. 고맙습니다.

sceptic 2008-06-30 23:44   좋아요 0 | URL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책도 머리로 읽는 책이 있고 마음으로 읽는 책이 있는데 가끔 몸으로 읽는 책이 있지요... 공감해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