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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ㅣ 빛깔있는책들 - 즐거운 생활 269
조윤정 지음, 김정열 사진 / 대원사 / 2007년 12월
평점 :
자판기 커피, 혹은 다방 커피 중독 현상은 담배의 니코틴 중독처럼 카페인 중독에 불과하다. 원두커피나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크림과 설탕이 적절히 배합된 커피 믹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된장 찌개에 김치를 먹어야 밥을 먹었다는 포만감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커피는 당연히 그렇게 먹는 것인 줄 알았다.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머리가 나빠진다(?)는 전설에 근거한 어른들의 협박과 경고에 못 이겨 한 잔도 얻어 마시지 못했다. 유리병에 담긴 커피 알갱이에 큰 유혹을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나 보다. 대학에 입학해서 드디어 맘껏 커피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서 마실 수 있는 물 다음으로 저렴한 음료였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이 달라져 우리는 밥보다 비싼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신다. ‘된장녀’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지만 확고하게 자리잡은 커피 문화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점이 이르렀다.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스타벅스’를 필두로 볶은 커피 원두를 의미하는 ‘커피 빈’, 이탈리아의 창업자 안토니오 파스꾸찌의 이름을 딴 ‘파스쿠치’, 1998년 국내 순수 브랜드로 출발한 ‘할리스’ 등 고개만 돌리면 커피 전문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두컴컴한 조명, 초이스라는 상표를 메뉴판에 적어 놓았던 이전 시대의 ‘카페’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이제 삼십대 중후반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밝고 환한 조명과 통유리로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개방감은 안과 밖을 구별하기 힘들다. 사회 분위기나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공간은 카페이다. 커피라는 음료는 이제 이국적인 기호 식품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 생활 속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커피를 이해하는 일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커피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커피의 종류나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조윤정의 <커피>를 읽는다. 광화문 성곡 미술관 옆에서 ‘커피스트’를 운영하는 조윤정의 <커피>는 읽는 맛이 남다르다. 커피를 입이 아니라 눈으로 마시는 느낌이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김정열의 적절한 사진 덕이다. 책은 종류에 따라 삽화나 그림, 사진이 방해가 되거나 가독성을 해칠 수 있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커피의 종류와 로스팅이나 추출 과정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기계들을 보여주고 설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게 적절한 사진이 요구되고 본문과의 배치나 편집이 중요하다. 핸드북으로 적당한 분량과 크기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커피>는 언제 어디서든 가볍게 들고 다니며 반복해서 읽고 정보를 확인하며 눈으로 마실 수 있는 책이다.
에스프레소espresso란 영어로 익스프레스express, 즉 빠르다rapid,fast는 뜻이다. 추출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마시는 시간도 빨라야 한다. 황금색 크레마와 함께 짙은 향과 맛을 음미해야하기 때문이다. 커피의 본질이자 정수인 에스프레소는 단순히 진하고 쓴 커피가 아니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는 숨길 수 없는 커피 본연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커피의 맛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쓴맛과 신맛이 어우러져 깊고 풍부한 향기와 함께 원산지와 로스팅에 따라 원두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핸드 드립식이나 커피 메이커로 아메리칸 스타일을 즐기지만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시작이며 끝이다.
다양한 방식의 블렌딩과 각종 첨가물이 가미된 커피를 마시지만 이것들은 모두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하는 커피들이다. 생두와 원두 에스프레소가 빚어내는 커피의 깊은 맛이 매니아를 양산하고 있으며 와인처럼 급속하게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자판기나 다방 커피가 아닌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커피>는 재미있고 즐거운 여유 시간을 만들어 준다. 물론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도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안내서가 된다.
커피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영국의 커피회사에서 3년 가까이 일하며 커피와 로스팅을 배운 저자가 ‘커피스트’를 운영하며 실전에서 경험한 노하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로스팅과 추출 방식, 핸드 드립과 바리스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실전을 위한 조언에 가깝다. 커피를 하나의 문화 기호나 연구 대상이 아니라 커피를 직접 만들고 마시며 서빙하는 사람의 애정과 숨결이 묻어 다른 책과 구별된다.
어떤 커피를 어떻게 마실 것인가는 이제 선택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주변에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생두와 원두를 목적과 입맛에 따라 손쉽게 갈아 마실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생두를 볶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언감생심이다. 원두나 갈아 크레마의 색깔이나 기웃거리며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싶다. 그것이 커피든 다른 것이든, 선택의 즐거움과 창조의 기쁨은 어디에나 있다.
08021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