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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중독 - addiction. 병적 증상에 대한 의과적인 진단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환자라고 말한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인 상태를 일컬어 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미셸푸코의 <감옥의 역사>에 따르면 병원은 비정상인 미치광이들의 수용소에서 기원한다. 정상이 아닌 정신 상태나 정상이 아닌 몸의 상태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는다. 정상인으로 돌아오면 다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중독인데도 칭찬을 받거나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일중독이 그러하다. 일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도 힘들고 병으로 분류하기 어렵기도 할 뿐만 아니라 나쁘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 탁월한 능력, 일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괴물같은 인간형은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들어 치유 불가능의 상태에 이른다. ‘과로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의 기저에는 어두운 그늘과 잘못된 인식들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만 할 수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그리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고민한다. 돈과 시간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집만 ‘여가 시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레져 산업은 미래에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쫓기듯 그리고 ‘빨리빨리’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가만히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뒹굴뒹굴하면서 게으르게 보내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과연 그러한가?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이러한 통념과 편견에 대한 충고이자 학문적 고발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부록으로 번역하면서 일중독에 대해 연구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명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굶어죽는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이 크게 여유있게 전개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뛰고 일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전쟁같은 오늘을 보낸다. 매 시간 10건씩의 산재 사고가 나는 나라에 살면서도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뭔가 이상한 나라가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열심히 살자’는 말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강자와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멈출 수 없는, 지칠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달린다. 한 번 입력된 목표는 수정되지 않고, 뚜렷한 삶의 목표(대개의 경우 물질적 부, 사회적 명예나 권력)는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두를 중독으로 만들어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참으라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고. 공부든 일이든 우리는 목숨 걸고 한다. 남들보다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이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정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나아가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처럼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배타적 민족주의나 획일적 국가주의를 체득하게 된다. 원래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서의 쓸모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 파괴’다. 또 이러한 인간파괴가 이미 가능했기 때문에 그 환경파괴조차 쉬이 가능할 것이다. - P. 79
학교의 기능은 이미 순종적 노동 기계를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다양한 경험, 질서와 봉사, 배려와 희생은 잊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복과 머리, 지시와 복종, 반복 숙달, 야자와 보충, 입시 지옥 등 떠오르는 것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대부분 기업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을 갖춘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산학협동은 그대로 학교가 기업을 위한 노동자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하겠다는 협약이 된다. 취업과 실업은 천당과 지옥 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우리의 목을 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제 또다른 신분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회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일중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러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강수돌은 일중독의 심각성과 위험성 그리고 ‘동반중독’과 ‘2세 중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일중독의 특성과 유형을 나누고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근원을 살피고 가정, 학교, 군대, 직장으로 나누어 사회적 배경을 점검한 후 경험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일본, 미국,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한 4개국 비교 연구는 흥미롭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같은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일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대안과 주장이 미흡하다.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사회적 차원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추후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일중독을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P. 55)”라고 정의한다. 생존기계로서 기능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미래의 삶은 모든 것을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풀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교육 환경을 변화시키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쇠사슬로 묶어가고 있다.
<‘나’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보여주었던 저자의 관점은 변함없다. 기존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낯설게 바라보는 대안들이다. 정답은 없지만 변혁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내재한다. 다만, 그 꿈이라는 것이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삶의 진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나 물질적 소유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중독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점검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알콜이든 약물이든 일이든 혹은 사람이든지 말이다. 나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 돌아본다. 중독은 집착을 넘어선 병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특히 사회적 비난이나 삶을 황폐화 시킨다는 자각 없이 끝을 모르고 질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일중독이나 의존적 관계중독이나 그 끝이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헛된 꿈일까?
07111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