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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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들,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함형수 시인의 말처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한 편의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독자마다 다르다. 동갑내기여서가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일시된 감정으로, 혹은 공감을 극대화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면 어떤 방식의 접근 방식보다도 세계를 , 혹은 과거를 해석하고 규정하며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의 하나는 바로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사서 읽는 일이라고 말하겠다. 한가로운 주말에 눈을 떼지 못했던 그의 장편은 기꺼이 그의 책들을 의심 없이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었다. 책을 쓰는 방식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다. 그런 점에서 김연수도 한계와 단점을 지니고 있다. 몸으로 부대끼는 현장성이나 폭넓은 사회적 관심에 대한 부족은 나의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그의 단편들이나 장편을 통해 우리가 그를 만날 때 가졌던 아쉬움이 남더라도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전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만원의 행복은 연예인들의 쇼가 아니라 책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인드라망

인드라망은 제석천이 사는 도리천 세계의 하늘을 뒤덮은 그물을 지칭한 것인데, 모든 그물의 매듭에는 구슬이 달려 있고 그 구슬 모두에는 사바세계 전체가 비추어진다고 한다. 그물 매듭의 구슬이 세계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세계의 모두가 하나의 그물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즉(卽)하고 의(依)하여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세계로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촘촘한 그물이 덮여 있다. 그물에 매달린 구슬들이 서로 비추어 주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온 과거이며 현재이고 미래의 모습이다. 어떤 논리와 합리적 이성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생의 아이러니에 대해 작가는 정교한 씨줄과 날줄로 그것들을 직조하고 있다.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가 『링크』에서 주장한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것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여자 친구의 삼촌 그리고 노동운동가였다가 프락치로 등장하는 강시우의 아버지가 중첩되고 연결되면서 독자에게 흥미와 공감을 선사한다.

  독일에서 만난 헬무트 베르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듣고 싶다. 그 선율을 타고 한국과 독일, 서울과 베를린과 평양, 제 2차 세계대전과 광주, 강경대와 김귀정은 모두 연결되었다가 흩어진다. 세계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을 감추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만 모르는 것은 아닐까. 그 연결 고리들을 찾는 재미가 이 소설에는 담겨 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 P. 150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 P. 378


  나와 세계와의 갈등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저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이 말들에 공감하게 된다. 불가해한 인생과 그 연결망에 대한 신비로움은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일인지도 모른다.

2. 사랑

  그는 정민을 사랑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1인칭 화자인 나는 ‘정민’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그녀는 그의 전부였고 생의 목적이었고 생명이었다는 식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랑의 방식들 중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선택한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연결되고 사랑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현실을 직시한다.

  나의 정민에 대한 사랑과 베르크의 안나에 대한 사랑은 비교할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의미와 사랑이 찾아오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극히 작가의 개성에 해당할 이 사랑의 방정식 또한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된다. 가령 이런 구절들,

내가 한때나마 존재했었다면 그건 오직 당신 때문이었어. 얼룩무늬 소피에게 맹세했다시피. 존재가 없었다면 고통도 없었을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이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 나는 그 고통을 매순간 맛보고 있어. 너무나 달콤한 고통이야. 나는 지금 하얀 숲속에 있고, 모든 것은 끝나가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그 고통을 이제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 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P. 270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인 ‘사랑’은 존재한다. 그것을 확인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리고 그것은 ‘그리움’이라는 형태로 변형, 왜곡되기도 한다. 그녀 혹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그리움의 본질은 온기의 결여였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기억에 대한 방식 때문이다. 이성적인 작용이나 두뇌의 한 구석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기억은 놀랄 만큼 문득문득 선명하고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옥상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뺨에 스친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땀이 나도록 맞잡은 손의 온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이 이루어질 확률도 그것이 이어져가는 방식도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과 삶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1인칭 화자인 내가 사랑한 ‘정민’은 어디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3. 우리의 인생, 그 후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 P. 384

  지나온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참으로 편리하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진다. 안개처럼 아련한 추억들은 재생할 때마다 편리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우리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미화된 사진으로 인화되며 삶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적당한 망각과 편집과 재생 기능이 없다면 견뎌낼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 고통과 환희들을 모두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이렇게 회고담의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식일 수도 있다. 짧은 생에도 이토록 많은 기억과 관계들이 그물처럼 얽혀있다. 그래서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제공하는 것이 작가들의 몫이다.

  1991년 10월 이전을 정리한 김연수는 이 한 권의 소설로 시대를 마감했고 정리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단편처럼 읽히다가 정교하게 얽히다가 하나로 묶인다. 스스로 ‘프로 소설가’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 그 목소리에 공감하며 벌써, 다음 소설을 기다리는 성급한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인생, 그 후를.


07100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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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0-0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의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다들 좋군요. 발췌하신 소설속의 구절도, 님의 쓰신 리뷰속의 구절도 와닿는 것이 많네요. 잘 읽고 갑니다.

sceptic 2007-10-10 20:4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소설가라서...이 장편도 좋게 읽었습니다...여러가지로 보여주니까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었어요...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