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2
조향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노을
어디서부터 울려 퍼졌나
꿈결처럼 아련한 노랫소리
영원인 듯
먼 지평선 아래로 잦아드는 화음
마지막 발자국을 지우며
사막 끝으로 장엄히 사라져간 부족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랫소리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는 시인을 만나기 어렵다. 시의 범주 안에서 살갑게 부대끼는 소리만 들릴 뿐인 시들과 마주하는 일은 지겹다. 같은 대상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과 방법을 통해 언어의 울림을 전해주는 시인은 그만큼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조향미의 세 번째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는 자연의 울림과 생활의 발견으로 가득하다.
자연을 통해 전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숨겨 버릴 수도 있지만, 미주알고주알 친근하게 토로할 수도 있다.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고 그 선택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빛깔과 향기로 남는다. 그 모든 재료와 조리법은 언어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세와 대상들에 대한 인상을 전하는 시도 있다. 조향미의 ‘노을’은 하얀 화면에 소리 없이 빛이 스미는 장면을 보여준다. ‘노랫소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소리는 없고 그리만 남는다. 시각화한 이미지는 선명한 심상의 울림으로 남는다.
시라는 형식을 통해 무엇인가 발언하고 싶은 내적 욕망을 얼마나 조절할 수 있을까? 섣불리 뱉어낸 과잉 감정의 토로나 육화되지 않은 건조한 말들로 조합해 낸 시들은 이내 균열을 일으키고 가슴에 닿지 못하고 무너진다. 조향미의 시들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속삭인다. 서정시가 보여줄 수 있는 감각의 이미지들을 잘도 잡아낸다.
산복도로 봄볕
스펀지 비어져나온 낡은 의자
구부정히 해바라기하는 백발노인
흐릿한 눈길 아슴한 저 길 위에
무장무장 쏟아지는 봄볕
황감하여라 두터운 봄볕
그러나 겨울옷처럼 묵은 육신
그만 벗고 싶다 하얀 나비처럼
팔랑팔랑 꽃상여 타고 싶다
죽기에 좋은 날이다
절대 적막과 두터운 봄볕 속에서 ‘죽음’을 보는 시인의 인식태도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탈속적인 경지에 이른 생의 무결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죽기에 좋은 날’이 어디에 있는가? 죽는 날은 모두 ‘좋은 날’이다. 흰소리 집어치우고 팔랑팔랑 꽃상여나 타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끊임없는 경쟁의 시선을 던지는 시인은 행복할까? 나는 마음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시인들은 마음에 대해 잘도 말한다. ‘그대는 어디 자취도 없’고 ‘마음의 샘’은 아득하기 만하다. 두레박줄 내려 보지만 ‘찰랑!’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등 하나 잠기지 않는 마음의 끝자락만 잡았을 뿐이다.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없는 욕망이 무화되는 순간이다. 가려고 하지 말자. ‘마음은 가도 가도 끝없다.’
마음
가도 가도 끝없다
그대 마음의 솜털까지 헤아릴 듯
햇살처럼 화안하던 그 자리
한순간 자욱이 안개 내리고
천지사방 길 끊기고
그대는 어디 자취도 없네
아득해라 마음의 샘
두레박줄 내리고 내려도
끝닿을 줄 모르다가
드디어 찰랑!
수맥을 찾은 듯
한 동이 물 가쁘게 당겨올렸으나
막상
두레박은 텅 비어 있네
손등 하나 못 잠기네
07100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