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의 아나키즘
노암 촘스키 지음, 이정아 옮김 / 해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상상해봐, 어떤 사유私有도 없다고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모두가 형제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공유한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존 레논의 ‘Imagine’이다. 반자본, 반국가, 반종교를 외치는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광고음악으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한참 동안 핸드폰 컬러링으로 사용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팝송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첫 페이지를 여는 노래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은 자유이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 인간이 꿈꾸는 완전한 세상이다.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면 아나키즘도 다양한 방식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와 모호한 경계를 드러낼 때도 있고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한 이념적 틀이 중요하지는 않다.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그리고 최초의 <최초의 아나키스트>의 주인공 윌리엄 고드윈의 생각도 아나키즘을 대표할 수는 없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쉽게 규정되거나 함부로 단정짓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채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형생성문법’으로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한 촘스키는 늘 사회를 향해 발언한다.  

  <촘스키의 아나키즘>은 그래서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금까지 촘스키가 보여주었던 사유의 진폭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소수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를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학문적 바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청년정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생각이나 글들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풍향계의 역할을 해준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분히 미국적 현실에서 미국의 지성인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국내용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 자본주의의 절정에 선 나라에서 국가를 넘어 제국으로 치닫는 미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판단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열 살 때부터 그를 매료시켰다는 아나키즘은 도대체 어떤 사상인가? 단순하게 정부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고 편견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분명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반대한다. - P. 59

  어쨌든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촘스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명확한 개념을 밝히거나 아나키즘의 구체적 아젠다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각종 강연회나 인터뷰를 통해 철저하게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촘스키의 눈과 입을 빌려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를 적용해 나간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읽을 만하다. 

  억압과 구속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촘스키의 메시지는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말하는 방식이나 그의 눈에 비친 모습들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족쇄와 견딜 수 없는 모순들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겠다. 공무원과 국가를 상전처럼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한 번쯤 불합리하다고 느껴 본 사람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 있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자유’나 ‘혁명’ ‘피’의 이미지로 대변되지 않는 아나키즘을 생각하며 엉뚱한 시가 떠오른 이유를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오늘은 머리가 엉켜버렸으므로.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07100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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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할 수 있으면 즐겁지요.아나키즘처럼 이상적이며 낭만적인 것이 어디있겠습니까...인류가 사라지지 않는하 규제적 이념정도로만 '이매진'될 것입니다.그것도 의미없는 일은 아니지만...보이지않는 모순들을 보더라도 아나키즘적 방법이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읽던 테리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한대목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나 형식을 부인하는 니힐리즘,독재와 아나키가 실상 한 동전의 이면임을 알아야한다."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맥락에서 이 논의가 나왔는지는 알기때문 뉘앙스는 이해합니다.멀리 거슬러올라가면 마르크스와 바쿠닌 논쟁(고진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맑스가 바쿠닌편에 가까왔다고 말하지만) 식민지시대 아나볼 논쟁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아나키즘의 풍부한 상상력은 여러가지로 응용가능하고 보완적 성격을 가질 수 있지만...거대담론으로는 규제적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sceptic 2007-10-05 18:17   좋아요 0 | URL
아나키즘은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고, 존 레논의 노래가 낭만적이죠...^^

맑스와 바쿠닌은 갈등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제 생각엔 사상적으로 가장 근접한 동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진에 말에 공감하는데요,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맥락에 놓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다양한 방법론과 현실에 대한 접근 방법이 파격적이라는...

어쨌든 꿈이나 꿀수 있는 현실 저편의 이상이 아니라, 정교화한다면 현실에서도 실현 가능한 방법들도 찾아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매진'을 한 번씩 들으면 마약처럼 노곤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