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실존주의 철학자 부버는 “교육은 만남이다.”라고 선언했고, 볼노우는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교육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위 이전의 문제다. 서로 자아를 확인하고 관심과 공감이 형성될 때 만남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겹쳐지고 누벼지는 지점이 없으면 만남은 불가능하다.

  최근 들어 ‘○○, ○○를 만나다’는 책 제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별한 홍보가 필요 없는 무임승차를 노린 새로운 마케팅 기법인 것 같다. 이다미디어의 편집팀과 홍보팀 관계자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책 제목이 성의 없어 보여 빛을 바란다. 박홍규의 책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예술, 정치를 만나다>는 대중적인 시각과 접근법으로 박홍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책이다.

  루벤스, 괴테, 바그너, 베르디, 피카소, 채플린, 사르트르, 레논 - 이들이 그 주인공인데 인물들 사이의 연관성으로 묶이기는 힘들다. 음악 3명, 문학과 미술이 각 2명, 영화 1명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앞에 4명은 20세기 이전, 뒤에 4명은 20세기 이후의 인물들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밖에 정치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더 많이 있지만 박홍규의 개별적 저작이나 다른 책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와 고전주의를 거친 예술의 특징들은 미술과 음악에서 공통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전 시대에 대한 반발과 계승 발전되었다는 주지의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거장들의 삶은 역동적이었고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정치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루벤스나 괴테, 반유대주의와 히틀러의 추종으로 유명한 바그너, 그와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베르디의 삶은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울거리는 한 인간의 모습과 고뇌하는 예술가의 면면들을 보여준다. 예술가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생각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거나 작품과 무관하게 정치적 행위들을 남겼다.

  19세기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와의 결합으로 예술은 한층 더 정치성을 띠게 된다. 격동의 20세기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게르니카>를 각인시킨 피카소나 온몸으로 세상을 풍자했던 채플린,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던 사르트르,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냈던 존 레논의 생은 그들이 남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만남이 예술에 선행한다는 전제가 가능하다면 표현주의 관점이라는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행 조건으로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저자는 연대기적 요소에 따라 이들의 삶을 단순화하여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유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당대의 역사와 사회, 정치 환경에 대한 해석으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예술을 해석하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모든 비평과 해석이 주관적이라는 전제하에 박홍규의 관점을 들여다본다면 공감과 관심을 충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예술가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현실 상황에 반응했을 것이며 그들이 남긴 작품들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뇌와 절망, 환희와 열망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으로 남는다.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정치’라고 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어내는 방법은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선사한다.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박홍규의 아나키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귓가에 맴도는 노래를 한참동안 컬러링으로 사용했다. 예술은 고급과 저급으로 나눌 수 없고 특히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 - 예술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오해되었고 100년 이상 이 땅에 뿌리 깊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삼중당 문고판 <구토>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채를린 영화를 다시 꼼꼼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오르세미술관전>보다 최근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보았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답게 바로크의 거장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거나 일목요연한 하나의 주제와 정리가 되어있었기 때문일까? 수백 년 전 유럽의 왕들의 호사 취미에 대한 거부감이나 가려진 민중들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직접 보지 않고 먼저 읽고 알고 규정 지어버리는 그림에 대한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눈에 낀 색안경이나 관념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림은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라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용어가 애매하고 모호해진다. 순수성은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 가치에 충실해야할 예술의 본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자유를 위해서만 복무하는 예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07082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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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08-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행위에 의해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만 만든 행위 자체에서도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무수히 다양해지니까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sceptic 2007-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말씀이시죠.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 없겠죠...만든 행위가 기본이고, 보는 행위는 다른 시각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