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꾸와 오라이 -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
황대권 글.그림 / 시골생활(도솔)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손톱이 길다며 쓰미끼리를 가져오라고 하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25년 전 외삼촌을 따라 이민을 가신 외할머니는 이제 80이 넘으셨다. 어린 시절 일본어를 배우셨고 인생의 황혼무렵에 영어 때문에 고생하실 외할머니의 고달픈 언어 생활을 돌이켜보는 일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굴곡진 한국사의 일부분이다. 컵을 ‘고뿌’라고 하시고 접시를 ‘사라’라고 하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하다. 물론 우리들 주변에서 지금도 그런 말들이 쓰이고 있기는 하다.

  부모님 세대의 끝자락 쯤에서 일제 시대에 초등 교육을 받았던 분들의 기억과 언어 습관에 남아 있는 일본말 뿐만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는 일본어는 아직도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공사 현장이나 당구장 등 일제 강점기에 새로 생겨난 물건이나 제도에 대한 용어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야끼만두’를 시켜 먹고 ‘우와기’나 ‘가다마이’의 준말인 ‘마이’를 입고 생활하는 것은 분명 한국인이다. 정말 고치기 어려운 것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황대권의 <빠꾸와 오라이>는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에 대한 철저한 확인과 분석 작업이다. 93년 1월말부터 5월까지 대략 4개월간 1만페이지가 넘는 일본어 사전을 뒤적이며 우리말에 남아 있는 일본어의 흔적과 어원을 찾아내는 일은 황대권의 영어생활 때문에 가능했겠다.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언어 생활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려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라는 것이 떠오르는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활 곳곳에 깊게 자리잡은 말들을 고쳐나가는 것도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국어 순화나 일본어의 잔재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른한 봄 햇살을 받으며 사전을 뒤적이고 우리말에 녹아 있는 일본어에 대해 확인하는 게으른 풍경이 떠오를 정도로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미있게 그것들을 추억하고 있다. 엽서를 통해 여동생에게 이 글들을 전했고 그것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니 감옥으로부터 전해진 엽서의 내용들이 하나의 주제로 묶인 책이다.

  일본어를 확인하고 어원을 찾아가는 방식이 유년 시절의 추억과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정감 넘치는 60년대의 풍경과 언어 생활을 먼저 보여주고 저자의 일기장이나 에피소드를 통해 일본어가 사용된 예를 들어주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수필을 읽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이야기하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듣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50대 이상 나이를 먹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유년 시절의 추억을 길어 올리는 흑백 필름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사용했던 일본말들을 확인하고 돌이켜보는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다. 35년간 일본의 억압적인 식민지 통치 아래 생활했고 해방후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의 말과 문화의 영향은 여전하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사라지겠지만 국적 불명의 어휘들은 정확하게 그 뜻과 어원을 알고 사용하거나 정리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과거사 문제와 상관없이 청소년들에게 일본 문화는 매력적인가 보다. 대중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일본인이 가진 정신과 생활 태도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한 국민 정서나 감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 나라의 말과 글은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한다. 맑고 깨끗한 언어는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논란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과 반성은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감옥에서의 추억과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펴냈을 저자나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우리말과 관련된 책들 속에 묻혀 갈 책일 수도 있겠다. 정확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기 위해서 일상속의 일본말을 확인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접근 방법도 좋지 않을까 싶다. 기억과 학습이 경험과 결합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테니까.


07042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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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4-2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뷰를 늘 기다리는 분 중에 한분이 인식의 힘님이랍니다. 매번 읽은 기회를 제공해 주시니 이 기쁨을 어찌 전해드려야할지....... 감사합니다.

sceptic 2007-04-2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사적으로 끄적이는 글을 읽고 덕담 나눠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봄날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