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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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이 힘이다’와 ‘모르는 게 약이다’의 대결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는 만큼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왕성한 호기심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알아낸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들도 많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한 것들도 많다. 인류 공헌의 측면에서 문명의 발달사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식의 발견이나 깨달음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되어 돌아온 과학의 발달과 발견들은 수없이 많다.

 로빈 베이커의 <정자 전쟁>은 생물학자가 쓴 인간의 문화사에 관한 보고서로 볼 수 있다. 특히 섹스와 관련된 인간의 거의 모든 상황과 유형들을 상황으로 설정하여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책이다. ‘종족 보존’이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인간’이라는 종의 성생활은 기막히게 동물적이다. 이런 종류의 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먼저 과학적 사실들이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흥미와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허구와 상상이 아닌 실험과 관찰에 의한 사실들은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며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두 번째로 저자의 글 솜씨이다.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하고 좋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로빈 베이커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연구 논문으로 도서관에 처박혀 몇몇 학자들에게나 인용되는 죽은(?) 지식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들을 전하고 싶은 욕구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을 이 책은 고루 갖추고 있다.

 학문적인 논문과 대중적인 저작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는 노력은 때로 위험해 보인다. 딱딱하고 지루한 주제와 논리적인 귀결들은 수면제로 사용되거나 아예 팔리지 않는다. 한편 허구와 가상이 주가 되어 흥미 위주의 저널리즘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많은 학자들이 이 간격을 메우지 못하거나 시도하지 않는다. 학문의 거탑 안에 숨어 먼지를 마시며 죽어가거나 밖으로 뛰쳐나와 연예인 수준의 글쓰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오래 공들여 쓴 책은 독자가 먼저 그 내공에 감탄한다. 모두 37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제시한다. 각 장들은 이렇게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저자가 이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철저하게 ‘종족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유전자 번식’을 위한 섹스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 예술과 외설의 논란을 교묘하게 비껴가고 있거나 한 복판을 걸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방법이다.

 십년 전에 출판된 이 책은 사회 문화적 측면의 관심과 시선의 변화에 의해 다시 주목받고 있으며 시대를 조금 앞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민한 부분을, 선뜻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널리스트가 아닌 학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연구하고 관찰해 온 사실들을 진지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용기가 인정받을 만하다.

 인간이 평생 살아가면서 2,000~3,000회의 섹스를 하면서 매번 수억 개의 정자를 쏟아내면서 왜 고작 7명 내외의 자녀밖에 두지 못하는가?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방패막이, 정자잡이, 난자잡이 정자가 있어 정말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가? 등 정말 궁금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이 빚어내는 미시적인 과학의 세계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동물행동학에 바탕을 두고 다른 포유류나 조류와 비교하면서 원인과 이유들을 살펴보고 있다.

 유전자가 원하는 것은 영속적이고 적극적인 종족의 보존과 번식이다. 이 하나의 분명한 원칙을 기준으로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남자와 여자의 행동으로 실현되는 과정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가지 의문은 남아 있다. 피임과 강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인간의 모든 섹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과연 단 하나의 기준과 가능성만을 가지고 인간 행동의 패턴과 행동들을 읽어낼 수는 없다. 그 한계와 문제점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부작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유감스럽다. 늘상 그렇지만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집중적이고 뚜렷한 하나의 주제를 폭넓게 이야기하는 신선한 관점의 책을 만나기도 어렵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전쟁’들에 관해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심리적 차이만큼 섹스의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종족 보존의 생존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정자들은 끊임없이 소리없는 전쟁을 치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태어나면서부터 현실생활에서 반복된다. 그 아득한 경쟁의 본능을 일깨워 오늘도 삶의 전쟁터로 모두들 뛰어 나간다. 우리들의 자화상은 이미 정자가 난자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 ‘전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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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0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비뫼 2007-03-2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여러 편 읽었습니다. 읽어볼까 아직 망설이고 있었죠. 님의 서평 잘 읽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

sceptic 2007-03-2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clausly님 늘 과찬이시구요. 리뷰와 페이퍼 늘 잘 보고 있습니다. 댓글 안달고 계속 봐도 되죠?

은비뫼님 이 책은 네이버 북꼼 서평 도서라서 많이 보셨을겁니다. 생각보다 한번쯤 볼만하다고 권할 수 있습니다...즐거운 책읽기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