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개봉 전 영화를 예매하듯이 나올 예정인 책을 예약 주문하는 것은 오로지 필자에 대한 믿음만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은 많이 망설였다. 필자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출판 의도와 내용에 대한 의심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엽서> 영인본이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그림과 함께 엮었다면 재탕 출판의 전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영복’이라는 또 하나의 상업 브랜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원저자의 의도와 달리 가볍고 빠른 템포로 독자에게 접근하는 책들을 무수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예약 주문을 하고 한 달 이상 책을 묵혔다가 책장을 열었다. 1시간 남짓 선생님의 글과 그림 그리고 글씨에 취한다. 전날 마신 ‘처음처럼’의 부드러운 목넘김을 떠올렸지만 <처음처럼>의 글들은 목에 턱턱 걸려버린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재탕에 대한 우려와 내용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면서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을 깊이 우려했던 작가의 고민이 전해진다. 그래서 안심하고 본문을 열었다. 새로 쓰고 그린 60여편이 있다니 그만하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시각적 이미지가 전해주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에게 선생님의 글씨나 그림은 편안함 이상을 전해준다. 글씨의 내용과 글씨의 모양새가 어우러져 ‘더불어함께’가는 모습이다. 형식과 내용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합이라고 볼 만하다. 오랜 수형기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밝히시는 내용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살과 살을 부대끼며 온몸으로 부딪혀 인간을 배우고 펜대나 굴리면서 현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던 삶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곳곳에 배어 있다.

 내용과 글씨들은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다. 저자의 책들을 읽고 강연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다시 사서 볼 필요가 없다. 이 책의 목적은 내용에 있지 않고 조화와 연합에 있다. 글씨와 그림들이 내용을 바탕으로 연합군이 되어 드러내는 힘은 예상치 못한 효과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30, 40대를 넘어 10대와 20대에게도 하방연대의 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우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낸 노인의 재미없는 책이 아니라 친근하고 편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희망해 본다. 랜덤하우스의 기획과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결합되어 탄생한 책이지만 외적 조건들보다 서화에세이가 갖는 파괴력쪽에 힘을 실어 주고 싶은 바람이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책도 한 권쯤 필요하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P. 18

 처음이 갖는 무수히 많은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술을 처음 마실때처럼 아침에도 개운하고 뒤끝이 없는 소주의 의미도 마찬가지겠지만. 언제나 새날인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다른 의미에서 하루살이가 되고 싶다. 오늘과 다른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는 매일 매일은 얼마나 근사한가. 근사한 꿈은 꿀수록 좋은 것이 아닌지.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 P. 50

 말없이 깊이 공감하며 실천으로 대답할 일이다. 머릿속의 앎과 지식들이 손과 발로 실천되지 못하거나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갑론을박하고 있다. ‘더불어함께’라는 방법론은 더더욱 모호하고 어렵기만하다. 실천적인 사람들의 일관된 모습을 부럽기보다 두렵다.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으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발’까지는 언제 가나……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분석이나 많은 정보가 아니라
대상과 필자가 맺는 ‘관계’로부터 옵니다.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연결됨이 없이
대상을 관찰하는 관계는 ‘관계없는’ 것과 같습니다. - P. 191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워하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다는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성향의 나 같은 사람은 사회생활이 힘들다. ‘관계없는’ 것으로 전제하면 편하지만 ‘이성’과 ‘감성’ 부분의 부조화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 ‘관계’의 기본을 부정한다. 관계 맺기의 기본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인지 믿음과 배려인지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어려운 일이지만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분석이나 많은 정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관계’로부터 온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슴’을 만나면 곧바로 ‘발’에게 가야겠다.


070317-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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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7-03-20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약주문하고 받은후 얼핏 넘긴 책장에서 기존의 책과는 다른 약간은 재탕 형식의 분위기가 있지 않나 싶어서 아직 펼치지 않고 있었는데 그 불식을 없애주는군요.

sceptic 2007-03-2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살다보면 헷갈릴수 있지요...^^

잉크냄새님, 출판사가 마케팅에 능한 회사라서 좀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만 책은 걱정보다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