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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제2판 34곳 삭제판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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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상은 없다. 그러나 해석은 가능하다. 문제는 객관성이라는 잣대다. 히스토리에 들이댄 중립의 칼날은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도와 달리 피눈물을 나게 한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를 언급한다고 해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엄연히 우리를 유린했으며 그중에는 위안부로 불리던 성노예도 있었다. 이 사실은 변함없다.
박유하는 달리 주장한다. 약 20만 명에 이른다는 숫자는 과장이며 위안부 가운데 강제로, 그것도 일본군이 직접 착출한 경우는 없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는 가난 등의 이유때문에 반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며 이들을 모집하고 데려간 이들 또한 한국인들이었다. 요컨데, 일본 제국주의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위안부를 동원한 적은 없다. 따라서 정부의 책임은 아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현재 일본 정부가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궤변이다. 그가 제기하는 오류는 사소한 것일뿐 역사적 실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소녀상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한다. 상징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위안부의 본모습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곧 거의 모두가 20세가 넘었으며 속았건 그러지 않았건 스스로 가담한 매춘부라는 것이다. 또한 그녀들의 처우도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꽤 괜찮은 조건이었으며 그 중에는 자신을 애국자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휴유, 여기까지는 그녀의 생각이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결국 위안부는 우리가 만들어낸 산물이며 설령 피해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 일본 정부에 문제제기를 하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과다하다는 것이다. 더우기 국제사회에서까지 논란을 확대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칼날은 일본이 아니라 위안부 동원 과정에 가담했던 조선인들에게로 돌려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만약 그의 생각을 소설로 옮겼다면 기분은 나쁘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 어차피 거짓이니까. 그러나 학자로서 마치 새로운 진리인양 위안부를 대하는 것은 역겨운 짓이다. 그는 반발한다. 학문의 자유도 없냐구? 자신은 사료에 근거해 엄정하게 연구한 것뿐인데. 그렇다면 생존 위안부를 만나보기라도 했는가 묻고 싶다. 만약 단 한 명이라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증거들은 한낱 종이뭉치에 불과하게 된다. 어디서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