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와 500자 원칙

 

헤밍웨이는 작가중의 작가다. 단지 내용이 빼어나서만은 아니다. 글쓰기와 관련한 온갖 기법을 마스터한 장인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는 단 500단어만 활용하여 쓴 소설로 유명하다. 얼핏 보면 바다에서 한평생을 보낸 어부의 넋두리쯤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갈고 닦은 하드 보일드 문체의 결정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사와 형용사를 최대한 배제하면서도 심오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 신문사 특파원을 하며 하드 보일드 문체를 다듬었다. 장황한 수사와 구질구질한 문장에서 탄출하여 사실적이며 적확한 묘사로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소설 또한 유행을 타는 법. 더이상 특유의 문장이 먹히지 않자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는 구렁텅이에 빠져있던 헤밍웨이를 구한 구원자였다.

 

그렇다면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어떤 원칙을 갖고 글을 썼는가? 얼핏 방탕한 자각의 대명사처럼보이지만 그처럼 규칙적으로 집필을 한 사람도 드물다. 무조건 아침에 썼다. 단어수를 세어가면. 다시 말해 오늘 200자를 쓰겠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도 분량을 채웠다. 내용이 마음에 들고 안 안들고는 다음 문제였다. 일단 양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바깥으로 나갔다. 술을 마시고 바닷가에 뛰어들고 또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었다. 오전에 쓴 글은 단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도 똑같은 일상을 이어갔다. 이른바 자기만의 루틴(좋은 습관>을 이어간 것이다.

 

나도 이 방법을 본 따 글을 쓴 적이 있다. 한시간 일찍 일어나 출근 전까지 쓸 단어수를 정해놓고 글을 썼다. 참고로 한글 워드프로그램에서는 원고지 매수와 글자수를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날은 더 쓰고 싶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단 한 글자도 쓰기 싫을 때가 있었다. 심지어는 30분 내내 다음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커서가 깜박거리는 것만 쳐다보기도 했다. 그 때 깨달았다. 헤밍웨이의 위대함을. 하루에 새로운 이야기로 정한 글자를 채워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완전히 탈진한 그가 제정신으로 어떻게 남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까?

 

작가는 창조자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을 열어젖히는 신이다. 동시에 성실한 일꾼이다. 단 한순간도 놓치면 조화는 어그러지고 등장인물들은 미친듯이 날뛴다. 창조주가 아니고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다행히 세상은 그런 인간을 자주 지구에 내려보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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