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제 마음을 그렇게 모르겠어요?”

 

그 말만 벌써 수백 번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마치 중2 사춘기로 돌아간 것처럼. 그녀는 일어나서 길게 늘어선 줄을 피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요동치는 가운데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김빠진 콜라를 들이켰다. 이미 식어버린 감자튀김과 한입 베어 물고 남은 햄버거를 쓰레기통 투입구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넌 정말 개새끼다.

 

사람들은 착각에 빠진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불멸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둘은 첫사랑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제대로 읽어보면 첫 장면부터 놀라고 말 것이다. 로미오는 실연의 상처를 가득 안은 젊은이로 나온다. 그래봤자 열여섯이지만. 첫 연인을 잊지 못해 방황하다 줄리엣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안나 까레리나>는 또 어떤가? 희대의 불륜녀로 보이는 그녀지만 소설은 오빠가 바람피우는 바람에 그 부인, 곧 시누이를 달래기 위해 모스크바로 달려가는 기차 안 풍경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스스로 부정을 저지르게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마치 로미오가 두 번째 사랑에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듯이. 세상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펼치는 한바탕 연극이다.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것은 동네 놀이터였다. 그녀는 그네에 앉아 울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조명등 아래에서 얼핏 보아도 갓 중학교에 입학한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놀이터를 지나 늘 뛰곤 하던 코스에서 조깅을 삼십분 정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없었다. 담배꽁초만 모래밭에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댄스클럽에서였다.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오후에 선생을 모시고 춤을 배우는 곳이었다. 시에서 운영해서 꽤 저렴했다. 수강생은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다. 한참 춤을 추고 싶을 나이다. 에어로빅으로 단련된 아주머니들이 맨밥에 콩처럼 있고 남자는 나 혼자였다. 달마다 수강을 하기에 아주 가끔 남성들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석 달 이상을 버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남자들 속에서 여자는 더 잘 지내지만 여성들 사이에 남성들이 끼면 왠지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게이? 그건 절대 아니다. 남다른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처음에는 참고, 두 번째는 정말인지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세 번째는 어디 한번 하고 도전해본다. 춤도 그랬다. 아이돌들이 추는 춤을 보고 따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수차례 있었다. 심지어는 선생이 학생들에게 금품을 받아 반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다.

 

그럼도 불구하고 계속 춤을 추는 이유는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전교에서 발레를 가장 잘 추기로 유명한 그녀에게는 마약 쟁이 남자친구가 있다. 그는 매번 실수를 하고는 손이 발이 되기로 비는데. 그럴 때마다 화를 내다가도 정말 내가 곁에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용서를 하고 만다. 그러나 결국 남친은 또다시 마약에 절어 큰 사고를 저지르고 급기야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홀로 남는다. 발레복을 갖춰입고 연습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친구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발레 슈즈를 집어 던진다. 그렇게 며칠을 연습에도 빠지고 우울함에 젖어 있던 때 친오빠가 다가와 무심하게 한마디 던진다. 평소에도 대면대면하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다.

 

너 뭐하냐, 발레 안 가냐, 이제 뚱뚱해져서 포기했나 보지?”

여전히 비아냥댄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고 째려보기만 했다.

잘하는 게 그거 밖에 없잖아. 발레 빼면 뭐 내세울 게 있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남들 신경 쓰지 마. 그냥 시선을 즐기라구. 그러지 못하겠으면 그냥 무시하든지.”

 

다음날 다시 연습실 앞에 섰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연다.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은 어떻게 감히 네가 이곳에로 일치된 듯하다.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 토우를 고쳐 신고 평상시처럼 바에 다리를 올리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 , 트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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