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그나마 감사하는 것 중 하나는 여전히 책 욕심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한창 때처럼 한 작가에게 꽂히면 그가 쓴 모든 글을 찾아 죄다 읽을 정도의 열정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주목할만한 신간이 나오면 놓치지 않고 보는 편이다. 어떤땐 이른바 고전이 된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질 때도 있다. <토지>도 그 중 하나다. 나는 <토지>가 한창 잘 나갈 때는 삐딱하게 바라 보았다. 박경리에게서 풍기는 고리타분함과 경상도 토박이로서의 이상한 자존감을 내세우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반면 조정래는 민중의 편이었다. 그가 쓴 <태백산맥>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민초였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연상시키는 서희는 내 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우연히 기회가 되어 손에 잡게 된 <토지>는 내 편견을 한방에 날려보냈다. 이른바 구한말의 시대상황이 절로 떠오르는 풍경과 군상이 손에 잡힐듯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냥 그 시절을 보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예리하게 관찰하며 인간들 속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박경리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