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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모든 병의 원인은 죄의식 때문이다.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사회가 압박하면 견뎌낼 재간이 없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사무실 풍경을 예로 들어보자. 상사나 사장이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직원들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뭉게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돌아와 하염없이 야근을 한다. 문제는 야근이 습관처럼 굳어져 업무시간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 거다. 아차피 붙잡아 둘 거 수당이나 받아먹자, 라는 식으로. 하루 할일을 정해 전투적으로 스스로 몰아붙이고 저녁 6시 땡치면 칼같이 일어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오던 나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현대사회는 만성 피로 사회다. 일과와 여가, 낮과 밤, 혼돈과 평온간에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일 나가고 지면 보금자리로 돌아와 온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밤 9시쯤 잠이 드는 생활을 이젠 더이상 볼 수 없다. 티브이의 프라임 타임은 밤 11시가 된 지 오래고 새벽 2, 3시까지 휴대폰 오락을 하느라 눈이 벌겋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뒤죽박죽이 스스로 원해서 이룬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고 뭐든지 몰두하게 만드는 '자기 착취'가 만연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무리 개인이 대안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해도 이단아 내지 낙오자 취급을 받게 된다.
한병철은 이 책에서 독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았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한국에 더 적합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피곤에 절은 인간들이 좀비처럼 어슬렁거리며 여유를 즐기며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공격해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