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예찬


어렸을 때 서예를 배웠다. 정식 학원은 아니고 학교에서 별도로 가르쳤다. 귀찮았다.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를 펴고 흐물흐물한 붓으로 충이니 효니 바른 생활이니 하는 하나마마한 말을 써야 했으니. 당연히 관심이 멀어졌고 한두 번 숙제로 제출한 걸 제외하곤 기억도 나지 않는다. 괜히 재료값만 버렸네.


국민의 힘 신임 대표인 이준석 씨는 당황했으리라. 휴대폰이나 태블릿에 익숙한 그에게 방명록은 외계문명 같았을 것이다. 게다가 손 글씨까지 써야 했으니. 그의 글씨체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다. 대표답지 않은 유치한(?) 글 모양을 지적하는 내용에서 손 글씨 자체가 없어진다는 구조적인 문제까지.


정직하게 말해 이건 시대의 흐름이다. 요즘 누가 손 글씨를 쓰나? 기껏해야 영수증 싸인 정도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글씨만의 매력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일단 손 글씨는 개성이 잘 드러난다. 편지는 대표적인 예이다. 짧게나마 손 글씨로 쓰인 카드를 받으면 여전히 반갑다. 아무리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여러 글씨체를 활용하더라도 그건 어차피 규격화된 것이다. 


보다 중요한 가치는 글씨를 쓰는 과정이다. 현 세대에게 손 글씨는 과거 내가 서예를 했을 때만큼 복잡하고 지루한 일일 것이다. 일단 필기구를 꺼내야하고 종이도 있어야 한다. 쓰다가 고치거나 지우기도 어렵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그냥 카톡으로 날리면 그만인걸. 그러나 장점도 있다. 글을 쓰다보면 사고도 다음어지고 마음까지 정갈해진다. 이제야 서예를 정신수양이라고 했던 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글을 쓸 필요는 없다. 괜히 부담만 커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필사다. 평소 읽어보고 좋았거나 도전해 보고 싶은 글을 배껴 쓰는 거다. 미루고 미루다 오늘부터 시작했다. 언제 다 옮겨쓰나 싶어 지레 겁을 먹었는데 뭐 그냥 하다가 싫증나면 그만하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책 제목은 모비 딕이며 원서다.


관련 기사/사진 출처 : 

'이준석 방명록'으로 돌아 본 손 글씨 상실의 시대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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