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극적인 경험이 오래 뇌리에 남아 신경증을 유발하는 증상을 말한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겪고 있는 질병(?)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치유방법은 회피다. 곧 거슬리거나 짜증이 날만한 상황이나 사람을 피한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노출이다. 다시 말해 반복적으로 접함으로써 불안 증세를 누그러뜨린다. 내게는 이 조치가 잘 맞지 않는다. 공포가 더 극대화되고 다른 분야까지 옮아가게 마련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트라우마를 마치 자신들만 겪는 양 과장하는 이들이 있다. 범죄자들이 그렇다. 상식 이하의 범행을 저지르고도 심신미약을 내세운다. 동시에 어렸을 적 상처를 들먹인다. 대학 다닐 때 그런 친구가 있었다. 머리도 좋고 행동도 빨라 얼핏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같이 어울리다 보면 꼭 막판에 꽁무니를 뺐다. 이를 테면 중간고사를 앞두고 함께 스터디를 하자고 모아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빠져버린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하루는 날을 잡아 이유를 물었더니 집안이 어려웠단다. 이런 황당한 변명이.
물론 트라우마가 병으로 커져 심각해지는 일도 많다. 그러나 그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의 뇌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방어벽을 칠 뿐이다. 같은 일을 경험하고도 선한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다. 어미와 아비를 잃고 왕이 된 연산군과 정종을 보라. 누구의 트라우마가 더 끔찍했겠는가? 나중에 알게 된 비극과 직접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가운데 누가 진짜 괴롭겠는가?
과장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한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같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나처럼 글을 써라. 쓰다보며 신경이 누그러지고 세상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걸 저절로 느끼게 된다. 진짜다. 행여 나쁜 마음이 들거들랑 당장 연필을 들어라. 혹은 노트북을 펼치고 한글이나 워드 프로그램을 클릭하라. 당장 쓸 거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그저 커서가 깜빡이는 걸 보아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