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때로는 단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하기도 한다. 


죄송하지만 님도 너무 예민한 거 아님?


대학에 간다면 사회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아니면 신문방송학. 삐딱한 마음이 있어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판적 생각이 꼭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글짓기 시간에 질서를 지키자는 주제로 글을 쓰게 했다. 뻔하디 뻔 한 소재였지만 나는 왜 줄을 서야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기 위해 우르르 몰리는 것은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제 시간에 정확하게 차가 들어온다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시스템이 정착이 되었지만 내가 어릴 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질서를 지키라고 할 게 아니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꽤 신박한 아이디어라고 여겼지만 선생님께 따로 불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튼 스스로의 정체성을 일치감치 발견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불행하게도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점수에 맞추어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학과를 골랐다. 그럼에도 사회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전공자 못지않게 관련 책을 읽고 수업을 들었다. 그 때 읽은 전공서적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사회학과는 멀어졌다. 더 나아가 과연 사회학이 필요한 학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말이 좋아 종합학문이지 사실은 다른 분야에서 중요하게 여지기 않아 버린 여집합이 아닌가라는. 사실 이 화두는 학부졸업논문 주제이기도 했다. 그 때 차용한 학자가 게오르그 짐멜이었다. 그는 주변사회학의 창시자였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을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다. 교육방송에서 명강의를 편집하여 내보냈는데 그 중에 언급이 되었다.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서울대의 이재열 교수였다. 사회학의 핵심 요소로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이를테면 짐멜의 2인 사회학과 3인 사회학 개념이다. 형제인 경우 자라면서 혼자 놀거나 같이 어울리는 방법밖에 없지만 3남매나 3형제의 경우 담합이 생긴다. 곧 둘이 짝을 지어 한 명을 따돌린다. 흥미로운 건 그 과정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는 사회성을 키운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아첨을 하든 붙임성 있게 굴든 사회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문제는 한명의 자녀를 두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성인이 되어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어른이 늘어난다. 연세대학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학년 전원 기숙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입학하면 무조건 송도에서 함께 일 년을 지내야 한다. 자연스레 형제자매애를 느끼게 하려는 배려다. 게다가 선배들의 압박이 없어 자율적인 의사결정도 가능하다. 또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남은 평생 끈끈하게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마치 노인이 되어도 훈련소 동기를 찾듯이. 더욱 재미있는 건 학생들도 좋아하지만 부모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사실, 외동아이들의 외로움도 달래고 사회에서 필요한 네트워크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사회학은 본질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스킬이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배워두면 편안한. 눈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경제학에서 눈치는 수치로 밝힐 수 없기에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사회학에서는 암묵적 합의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곧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지켜야 하는 묵시적 규율 같은.


사회학의 다양한 개념을 배워두면 쓸데없이 흥분하는 일이 줄어든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개인적, 구조적, 기능적으로 따져보며 필연성과 불가피성의 세상에 도달하게 된다. 2021년 1월 13일의 핫이슈는 이휘재 문정원 부부 집의 층간소음이었다. 구체적으로 아랫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문정원씨의 인스타그램에 하소연 글을 남겼다. 문정원씨는 답글을 달았는데 그게 사단이 났다. 사과인 듯 사과 아닌 묘한 뉘앙스였다. 죄송하지만 님도 너무 예민한 거 아님. 당장 인터넷에 불이 붙었다. 과거 이휘재의 무매너가 다시 화제가 오르고 아이들과 집에서 운동화까지 신고 야구를 하는 사진이 도마에 올랐다. 사태는 쉽사리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남의 일이라고 무시할 건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찰 건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댓글을 남겨 지지 혹은 비난을 할 것인가? 사회학자는 달리 행동한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고 삽시간에 퍼져 당사자의 지위나 더 나아가 일자리까지 위협받게 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 기사에 오르고 사건이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그저 과시형 일기장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제동장치 없는 무한궤도임을. 당사자끼리 풀 문제가 한낱 호기심 도구 때문에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다.


덧붙이는 말


이루다야말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사조다.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거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이 공상과학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제대로 다루어 볼 생각이다. 물론 이 때도 사회학의 키워드는 예리한 칼이 된다.  


사진 출처 : 문정원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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