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던 장관은 아니었지만

 

혼자 조용히 걷고 싶었다. 일곱 여덟 시간 정도. 한라산이 딱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때로는 맞다. 그렇게 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산에서 보기 힘든 현무암들 외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도리어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힘도 덜 들었다.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가벼운 하이킹을 나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때는 몰랐다. 얼마나 오만했는지. 속밭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숙소에서 마련해준 주먹밥을 먹으며 이러다가는 금방 백록담에 오르는 거 아니야 라고 기고만장했다. 오판이었다. 


지옥문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12시 30분까지는 진달래 능선에 도달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너무 속도를 올린 게 탈이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참고로 한라산은 보호구역이 많아 등산코스가 단 하나고 폭도 매우 좁다. 사람이 몰릴 때는 게다가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겹칠 때는 매우 혼잡하다. 진달래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 30분. 정확하게 출발한 지 세 시간 만이었다. 돌이켜보면 조금 더 쉬고 다시 출발했어도 좋을 뻔했다. 여하튼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제부터 진짜 한라산의 진면목이 보이는 구간이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 전까지는 하늘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한 산림이었다면 이곳부터는 서서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신 대가도 치러야 한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다. 게다가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한다. 이미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게를 줄인다고 다 마셔버린 생수 덕에 목은 바짝 말라오고 배낭의 무게는 천근만근으로 전해져 온다. 경사도 갑가기 가팔라진다. 


오로지 남은 건 정신력뿐. 정상에 가까워 오지만 백록담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움푹 파인 화산구니까. 그럼에도 띄어띄엄 보이던 등산객들이 어느 순간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들 한 목적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동지들이다. 정산 근처는 환호성이 끊이지 않는다. 연신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심지어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트게 틀어놓고 춤까지 춘다. 내가 바라던 장관은 아니었다. 왠지 머물고 싶지 않았다. 드물게 물이 많이 들어찬 백록담을 3분쯤 바라보고 바로 내려왔다. 내겐 흐릿한 기억밖에 남기지 않은 채. 10분쯤 내려오다 알았다. 이런 바보 같으니. 계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잖아.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를 대뇌이며 다시 한 번 올라갈까 순간 생각했으니 이내 포기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하산길이 인상 쓰는 인간들 천지였다. 나도 조금 전만 해도 저랬는데. 그렇다고 마냥 여유를 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바닥은 미끌미끌 거렸고 설상가상 무게를 줄인다고 우산도 준비하지 않았다. 비옷이라도 가져올걸,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온 신경을 발끝에 모르고 조심조심 내려오는 수밖에. 그저 조용히 걷고 싶었다고, 웃기고 있네. 지금 당장은 이 산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미 이곳에 들어온 지 일곱 시간이 넘었는걸. 유일한 위안은 곳곳에 보이는 안내판이었다. 입구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내가 살아 돌아갈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증거였다. 재미있는 건 구간표지판이 입구에 가까울수록 늘어난다는 거다. 올라갈 때는 용기를 내려갈 때는 위로를 주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눈앞에 내가 출발한 곳에 들어온다. 바로 앞서가던 두 사람도 기뻤나 보다. 올해는 더 이상 산에 갈 일 없겠다. 징하다 징해. 그게 바로 내 마음이었다. 지하철 입출입구처럼 생긴 바를 손으로 밀며 비로소 8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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