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간 전쟁의 서막
직장을 여러 번 옮겨 다녔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라떼만 해도 한번 일터를 정하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쭉 다니는 게 미덕인 시대라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참고 참고 또 참고 다녔더라면 나 또한 전형적인 꼰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직은 고단한 일이다. 매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한 다짐은 미련 없이 흔적 없이 사라지자였다. 언제 어떤 일로 그만두게 되더라도 깔끔하게 물러나자. 그러기 위해서는 들어갈 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일 외적인 것에 관심을 끊고 사적인 인연을 만들지 말자. 오로지 업무능력으로 평가받자. 그러기 위해서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할 줄 알아야 한다. 곧 구체적인 직무와 보상을 철저하게 챙겨야 한다. 또한 업무 외 일도 깔끔하게 정리해야 마땅하다.
이순재씨가 구설수에 올랐다. 전 매니저가 해고당하면서 억울한 심정을 방송사에 제보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매니저 업무 외에 생수배달이나 쓰레기 버리기 같은 잡일을 했다고 한다. 첫 반응은 차가웠다. 80대 노부부가 사는데 매니저가 그 정도 일은 해줄 수 있지 않느냐. 전전 매니저까지 나서서 이순재 선생님은 절대 사람 하대하지 않는다. 나는 허드렛일도 기쁜 마음으로 했다며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핵심은 잡무여부가 아니라 전 매니저가 4대 보험을 포함한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사실을 이순재씨에게 직접 하소연했다. 답변은 소속사에 알아보라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양측 다 잘못이 있다. 일단 전 매니저의 요구는 사과다. 자신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되어 불편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유명한 노배우라 하더라도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다. 게다가 아무리 관행이라고 해도. 또한 직업인으로서의 최소한의 보장도 받지 못했다. 월급 180만원이 땡이었다. 편의점 알바생도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했다. 문제는 해결방식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방송사에 제보했을까 싶지만 도리어 일을 키우는 거다. 불합리한 일이 있다면 자료를 모아 노동청에 신고하면 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이순재 측도 잘한 것은 없다. 구체적으로 소속사의 문제가 더 크다. 전 매니저의 품성 운운하며 개인 잘못으로 몰고 간 것은 전형적인 갑질이다. 다행히 이순재씨께서 기자회견을 포기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상대가 원한다면 진심어린 사과를 하겠다고 한 건 매우 칭찬할 만한 행동이다.
이제 더 이상 나이나 지위를 따져가며 혹은 관행에 따라 굴종적으로 일하는 시대는 지났다. 어쩌면 이번 일은 세대 간 전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부가 없으면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잡기 어려운 젊은 세대의 분노는 이미 끓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그 불길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