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 마주한 로봇이 엄마라면


모성애란 타고난 것인가? 만들어졌는가?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언젠가 소설의 소재로 쓰겠다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때의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긴다. 그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몰랐다. 여자 친구도 있었다.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둘은 연인이었다. 남자는 수수했고 여자는 화려했다.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내 잊어버렸다. 그들과 만날 일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갈 무렵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여자가 자살했다. 갓 돌을 지난 아이와 함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였다. 원인은 산후우울증. 기이한 경험이었다. 


넷플릭스 영화 <아이 엠 마더>를 보았다. 인류와 기계의 대결이라는 흔한 설정이었지만 특이한 건 모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점이다. 곧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전유물인가? 아니면 조작된 것인가? 태어나서 줄곧 로봇에 의해 자라 엄마라고 믿는 딸. 어느 날 자신을 낳은 친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혹은 그렇다고 믿게 되고 로봇엄마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데 알고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이쯤에서. 


어찌 보면 모성애란 만들어낸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엄마에 대한 감정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온 세상 모든 어머니가 아이들에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게 아니다. 그 중에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심지어 자식들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 죽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최근 5년간 0세에서 1세 사이 영유가 132명이 살해되었다. 대부분 부모, 특히 어머니가 범인이었다. 단순히 병리적 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원래 없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모성애가 유지되는 이유는 직간접적인 사회의 압력 탓이 크다. 곧 가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묵적인 합의가 강하게 작용한다. 여기에는 다른 동물과 달리 미완성 형태로 태어나는 인간에 대한 배려도 작용한다. 탄생 이후에도 일정기간은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성애도 이런 기간을 유지하기 위한 진화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영유가가 바로 부모에게 격리되더라도 케어가 보장된다면 큰 문제가 없다는 말이 된다. 영화 <아이 엠 마더>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유전적 모성애보다 사회적 보살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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