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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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를 거부해왔던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


작가들은 이기적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김보라도 그랬다. 자신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영화를 만들어 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의 단편 <리코더 시험>을 보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폭파와 살해 장면이 있다고 해서 무서운 영화는 아니다. 다른 사람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 먼 기억 속에 각인된 부끄러운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게 된다. 


1994년. 누군가는 그 시대를 살았고 또 어떤 이는 이전에 사망했고 아니면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던 생명들이 있다. 분명한 건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나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건 내게는 지워진 시절이었다. 도무지 어떤 추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는데. 그리고 김일성이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사정이 있었다. 나는 김보라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밝히기 어렵다. 


은희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용광로가 들끓고 있다. 오빠만 예뻐하는 부모. 살갑지만 늘 떠날까 두려운 남친. 희희덕거리면서 친하게 지내지만 절교를 경험하게 되는 친구. 느닷없는 동네 여자아이의 고백. 남모르게 흠모하는 학원 여선생. 그리고 귀에 난 혹과 수술 상처. 너무나도 사실적이기에 이건 본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든다. 굳이 이렇게까지 후벼 파는 이유는 뭘까? 가족과 화해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이 모든 의문은 인터뷰에서 풀린다. 그는 알았다. 부모는 자신을 바다로 던져버렸지만 구명조끼는 입혀줬다고.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보기를 거부해왔던 많은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음을. 자신을 진정으로 좋아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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