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잘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성스러운 장소를 찾아 


한 때 하루에 세편의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다. 단편이든 에세이든 아니면 한 줄의 일기든. 황당해 보이지만 뜻밖에 5년 가까이 지속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모두가 감동을 주거나 재미를 안겨주지는 못한다. 중요한 건 양이다. 곧 많이 쓰다보면 글도 는다, 는 사실을 절감했다. 


최근 들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우선 체력이 안 되고 창의력도 떨어진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독서의 부재다. 많이 읽지 못하니 글도 양껏 쓰지 못하는 거다. 실제로 과거 글을 열심히 만들던 시절에는 책읽기이 중요성을 절감했다. 구체적으로 어릴 때부터 읽었던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작가의 글이 모두 개인의 경험인 것으로 착각한다. 물론 한 두 작품은 그런 식으로 히트를 칠지 모르지만 꾸준히 하기는 어렵다. 체험보다 앞서는 것은 문장이다. 그 힘은 독서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책을 적게 읽으면 글도 많이 쓰지 못한다.


작가들은 본래 독서가다. 만약 책을 좋아하지 않는 글쟁이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다. 아니면 많이 읽고도 그렇지 않은 척 할 뿐이다. 실제로 하루키도 엄청난 책을 읽었고 읽고 있다. 심지어 레이먼드 카버에게 빠져 그의 단편을 일본어로 옮기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만약 내 글의 수준이 떨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책을 멀리한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근시에 원시까지 겹쳐 책을 읽으려면 안경을 꼈다 벗어다 하기 귀찮아서, 휴대폰을 보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서, 책값이 비싸져서.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변명을 들자면 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가 없어져서다. 꽤 사치스런 말처럼 글이 잘 써지는 장소가 있듯이 독서에도 적합한 곳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몇 곳을 꼽자면 지하철 안, 등받이가 있는 벤치, 도서관 1층 벽에 기댈 수 있는 구석 자리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사라지거나 접하기 어려워졌다. 


누군가는 뭘 그렇게 까다롭냐? 책을 좋아하면 아무데서나 읽으면 되지, 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책읽기가 취미가 아니라 생존인 사람에게는 하나의 숭고한 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나마 독서가 가능한 공간도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 끝나겠지라고 기대 섞인 희망을 하다가는 책 한 권 제대로 읽기 어려울 것 같아 칼바람을 맞으며 아무도 없는 공원의 등을 기댈 수도 없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정확하게 딱 20분. 그 이상은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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