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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ㅣ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시하면 떠오르는 건 뭔가 멋들어진 말이나 표현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좋은 시구다. 그러나 시다운 시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시는 다음과 같다.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사랑하니
그 밖에는 아무 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으나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했다
분명 그것으로 해서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하여
그녀의 훌륭한 친척들이 몰려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버렸고
바닷가 이 왕국 안에 자리한
무덤 속에 가두고 말았다
그러기에 달빛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게 되고
별빛이 떠오를 때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동자를 느낀다
하여, 나는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 곁에 눕노니
거기 바닷가 무덤 안에
물결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곁에
애드가 알랜 포가 지은 <애너벨 리>다. 이 시에는 이성복이 전하는 시의 진수가 모두 드러나 있다. 아무리 멋진 생각이라도 시에서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대신 몽롱하게 아름다움을 쫓고 있다. 하늘이니 키스니 역겹다니 하는 단어는 시에서는 금기어임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모호한 게 제일 정확한 거예요. 왜? 인생은 본래 모호하니까요. 알 듯 모를 듯해야 말에 힘이 붙어요. 시에서는 폼 나는 말을 안 하는 게 폼 나는 거예요. 뭐 좀 안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본래 모르는 거예요." _이성복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