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더디고 답답해보일 수도 있지만
당황스럽고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당장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늘 여러 가지를 시도해본다. 그래도 정 막히면 그 때는 마지막 카드를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드는데. 그건 바로 이성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먼트 단지 인도에 대형 오토바이가 서있다. 구석자리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인도이고 아이들의 방과 후 놀이터 구실도 하는 곳이라 당연히 방해가 된다. 우선 오토바이가 주차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하루 이틀쯤 기다린다. 혹시 다른 이유로 임시로 잠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있다면 방법을 생각한다. 오토바이 주인이 전화번호를 남겨두었다면 연락을 하면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연락처는 없다. 그럴 때 나는 종이에 "인도 위 오토바이 주차 금지"라는 글을 써서 안장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둔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옮길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우지 않는다면 그 때는 공식 기관을 동원한다. 곧 관리사무소에 전화하여 오토바이 등록번호를 알리고 정식으로 철거하도록 요청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일이다. 겉으로는 매우 더디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나의 일 처리 방식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때는 손을 놓는다. 내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업무와 관련하여 사람을 사귈 때도 마찬가지다. 이를 테면 약속시간을 정했는데 늦거나 별도의 연락이 없다고 가정하자. 일단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 때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다. 그 답이 납득이 되면 혹은 아닐 수도 있지만 뭔가 이유를 대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중요한건 일을 진행하는 거니까. 만약 세 번째도 같은 일이 발생하면. 삼진아웃이다. 따로 묻거나 따질 필요도 없다. 신뢰를 저버린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다.
덧붙이는 말
이 원칙은 세우기도 어렵지만 실천은 더욱 힘들다. 다행히 잘 지키고 있는 편인데, 만화 <시마 부장> 덕이 크다. 미국지사에 파견된 부장은 옥외광고가 집의 햇빛을 살짝 가린다는 민원을 접수하고 상대방을 만나러 간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예 만나주지조차 않는다. 어떤 보상을 하더라도 자신은 햇빛이 중요하다는 거다. 도리어 이런 저런 제안을 하는 과장을 경찰에 고발하려고 한다. 결국 어떤 협상도 하지 못한 채 광고판을 축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에피소드의 교훈은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해결책을 원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 목표가 불분명하면 잡다한 갈등이 연이어 발생한다. 또한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를 절대 직접 접촉하면 안 된다. 어떤 형태든 타협을 하던 협박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층간 소음이 발생한다고 해당 집에 직접 인터폰을 하거나 방문하여 문제를 얘기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지적을 받으면 감정적으로 격해지기 때문이다. 쪽지나 문자, 통화도 마찬가지다. 관리실에 연락하여 주의를 당부하는 것이 최선이다.
실제로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하도 시끄러워 경비실을 통해 인터폰을 했는데, 막무가내로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서 무슨 소리가 나냐며 땡깡을 부린 적이 있다. 순간 나도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더 이상 우리 집에 머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제야 상대방은 물러갔다. 결국 그 집은 나중에 이사를 갔다. 함께 흥분하기보다 이성적으로 대응한 것이 도리어 효과를 본 셈이다.
요컨대, 남과 혹은 단체나 기관과 문제가 생겼을 때는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