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지 않는 일의 항목을 하나씩 지워나가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줄곧 말했다. 맞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인 60대 초반에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줄곧 불안했다. 벌여놓는 사업은 늘 위태로웠고 사망 당시에도 상당한 액수의 빚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가족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급기야 장례식장에 빚쟁이가 찾아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 꽤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집은 날리지 않았다는 거다.
내 삶은 성공적인가?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실 나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살아온 날이 살아갈 시간보다 많으니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외형적으로는 실패다. 이른바 내 나이쯤의 한국 사람이 누려야할 평균적인 삶에서는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직장에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고 자식들을 건사하고 노후를 착실히 준비하는.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평균의 삶이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나름의 고민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생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나누는 건 옳지 않다. 아버지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니 아무래도 실패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리라. 그렇다면 죽음이야말로 절대적 실패인가? 핵심은 사망이 아니라 그 지점에 이르러 삶을 돌아보았을 때 후회스럽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후회스럽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탄식하지만 사실은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다행히(?) 나는 요령껏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해왔다.
물론 이렇게 된지는 오래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누구 못지않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았다. 정직하게 말해 지금도 이렇게 사는 게 바른지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은 몸과 마음이 바로 알아본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앞으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 곧 하고 싶은 일을 늘리기 보다는 내키지 않는 일의 항목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는. 역설적으로 그러다보면 저절로 하고자 하는 일이 생기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