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가지 일본의 냄새
김영길.이향란 지음 / 북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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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로 관심을 끈 아나가키 에미코의 새 에세이(그리고 생활을 계속된다)를 읽다가 작지만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신문기자로 바쁘게 지내던 그녀는 동북 대지진으로 삶이 휘청거렸다. 지진때문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수속 폭발때문이었다. 기술자나 관련 학자들의 안전하다는 주장을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저 바쁜 척하며 습관적으로 일을 해온 결과치고는 참혹했다. 나 기자 맞아?

 

"눈앞에서 중대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코 앞에 주어졌는데도, 사람들 장단에 맞춰 적당히 잔꾀를 부리느라 바빳던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산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슬쩍 한발을 빼고보니 그런 꼴불견이 없었다. 한 때 함께했던 이들중에는 지금도 그런 이들이 있다. 정부에서 주는 자리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잘났다며 목청을 높인다. 이처럼 숭고한 일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야.

 

그러나 나는 안다. 속으로는 불안감에 떨고 있음을.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떠들어대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쩌면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결국 목소리 큰 놈들만 모인다.

 

<250가지 일본의 냄새>는 뜻밖의 수확이다. 일본생활 경험이 있는 부분의 수필책이 얼마나 대단하겠어라는 편견이 있었다. 심지어 거의 자비출판에 가까운 것 아니야라는 의심도 했다. 그러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나가면서 이처럼 담백하고 솔직하게 일본을 소개한 책이 있었나 싶어 깜짝 놀랐다. 이어령씨처럼 현란하게 자기 자식을 뽐내며 쏟아낸 멋드러진 문장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자신들이 아는 것만 정직하게 썼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이.

 

"집을 나서면 미안해요, 죄송해요, 고마워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요. 아침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먼저 타라고 양보를 받으면 고마워요, 사람의 몸에 살짝 부딪치면 죄송해요. 돈 주고 밥 먹고 물건을 사고도 고마워요. 이 세가지 뜻을 모두 가진 하나의 말이 있어요. 도우모라는 일본 말이에요. 이 말 하나면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이 다 원만하게 되지요."

이 짧은 글이 지니는 무게는 헤아릴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일본의 한 도시로 장소이동을 한 느낌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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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샘 2019-07-25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250가지 일본의 냄새를 쓴 김영길입니다.
잡문에 불과한 책을 이렇게 극찬의 평을 듣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다하지 못한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을 낸 의도를 꿰뚤어 보아 주셔서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분이 있기를 하고 바랬습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네요. 블로그 운영자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김영길 拜上

카이지 2019-07-3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도리어 더 감사드립니다. 작가는 독자가 있기에 글을 쓸 수 있다는 상식을 다시금 깨닫는 고마운 답글이었습니다. 올여름도 건강하게 지내시고 좋은 글 더욱 더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