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계에 발을 디딘 지 10년이 넘는 동안, 호황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고 했는데(마치 단군 이래 출판 시장의 규모를 측정한 데이터가 다 있기라도 한 양), 희한하게도 대형 출판사의 매출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출간 종수도 해마다 늘었다. 문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진다는 거겠지. 부자 출판사가 하나 등장하면 수십 군데 출판사가 더욱 가난해지는 현상 때문이겠지. 아무튼, 책이 안 팔려도 너무 안 팔린다는 출판사들의 비명이 2002년 6월에는 아주 극에 달했다. 물론 월드컵 때문이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책을 사서 읽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축구에 정신이 팔려, 그 결과 출판사로 걸려오는 서점의 주문 전화가 급감했다. 그 와중에 단 한 곳, 유일무이하게 호황을 누리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홍명보 선수가 쓴 [영원한 리베로]를 낸 출판사였다.
과장이 꽤 섞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대충 듣기로는 2002년 6월 서점가에서 움직인 책은 [영원한 리베로] 단 하나였다. 사실 출판사에서도 축구에 관한 책, 그것도 축구 선수가 쓴 책이 그렇게 잘 나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축구는 몸으로 하고 눈으로 보는 것이지 책으로 읽는 게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신문에서 TV에서 인터넷에서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데! 편집자에게 듣기로도, 홍명보 선수를 매니지먼트하는 에이전시에서 출판 의뢰가 왔을 때, 이 출판사 편집자 두 명이 홍명보 선수의 대단한 팬이라 홍명보 정도 되는 선수의 책은 꼭 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냈을 뿐이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들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듯이. 아마 팬클럽이 움직이면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겠지.
홍명보 선수는 잘생겨서 일본에서도 팬이 많았다는데, 내가 봐도 이쁘기는 참 이쁘다. ^^ 책 전체에 걸쳐 사진이 풍성한데, 흑백 사진이지만(앞부분에는 컬러 사진도 16쪽 있다) 보면서 내내 눈이 즐거웠다. 거 참, 어릴 때도 이뻤더구만... *ㅂ*
승부에 동원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축구 선수라는 존재를 고민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국가가 엘리트를 육성하는 체제에서, 운동선수는 아무리 각광받더라도 결국은 승부에 동원되었다가 가치가 다하면 버려지곤 한다. 운동선수들은 학교도 오로지 운동을 위해서만 다니기 때문에,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고,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면 바보가 된다. 평생 운동선수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직접 뛰는 선수나 그걸 보고 즐기는 사람이나, 다 함께 즐겁게 발전할 수 있으려면 이런 현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다름 아닌 축구 선수의 책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글이나 구성이 치밀하진 않지만, 편하게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
느낀 점 하나, 홍명보 선수도 된장 냄새 폴폴 풍기는 한국 남자라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에서 뛸 때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원정경기를 하러 이동하던 도중, 부인이 현기증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구단에서는 당장 부인에게 가보라고 했는데, 홍명보 선수는 몹시 걱정되었지만 “병원에 잘 갔다니 경기를 마친 뒤 가겠다”고 ‘한국식 투혼’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리어 구단에서 완강하게 “경기도 중요하지만 지금 무슨 정신으로 뛸 수 있겠느냐”고 설득해, 홍명보 선수는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선수와 가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일본구단의 일 처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감탄했다.(116쪽) 그래서 나도 같이 감탄했는데, 책 뒤에 홍명보 선수 부인이 쓴 부분에서 같은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글쎄 그때 홍명보 선수는 ‘아내에게 가보라는 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날 경기를 모두 마친 후에야 병원으로 왔다.’(184쪽) 그러니까 구단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만 하고(!) 결국 제 고집대로 한 것이다. -.- (부인은 그때 홍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 선수들의 텃세를 극복하고 실력으로 인정받고자 힘들게 노력하던 때였기 때문에 섭섭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부록으로 실린 “홍명보 77문 77답”을 보다가 몇 번 웃었다.
언어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낀 때가 있는가(외국어 구사나 인터뷰에서)/많다.
나중에 자식들이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
우하하.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솔직하고 옳은 말인가.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지은이) | 은행나무
정 가 : 8,900원
출간일 : 2002-05-25 | ISBN : 898797698X
반양장본 | 252쪽 | 223*152mm (A5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