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를 論한다 - 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박효종 외 지음 / 바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보수주의자라는 사람들의 글에서 대단한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니, 정연한 논리로 자신들을 진단할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이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는 보수 비판을 하랬더니 진보 세력에 대한 비난이나 하고, 복거일과 함재봉의 글에서는 보수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대중에게 자기들이 잘했다는 걸 잘 표현하지 못해서(선전전에 패해서) 보수의 위기가 왔단다.

그러나 김정호와 함재봉의 글은 읽을 만하다. 함재봉도 보수는 역사 해석에 실패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긴 했지만, 이들 두 사람의 글은 전형적인 보수의 논리를 잘 정돈해 놓았다. 이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할 수 있어야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받은 인상은 이렇다.

첫째,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금 보수 세력이 대단히 위기에 처한 줄 아는 모양이다. 내가 봤을 때 여전히 한국 사회의 ‘힘’과 ‘돈’은 다 보수 세력이 쥐고 있는데?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바뀐 거라고는 자신들이 그토록 앙망해 마지않는 선진 자유시장경제 국가들의 법과 제도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둘째, 이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전쟁의 참상을 극복하고, 경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다 보수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라를 이만큼 발전시킨 주류, 보수 세력이 시대가 바뀌어 철없는 젊은이들에게 퇴물 취급을 받다니 쯧쯧쯧, 한다. 보수 세력의 오만과 욕심을 비판한 박효종 교수도 54쪽에서 “과거 대한민국 건국 시 혹은 6.25 때 보수주의자들의 헌신과 자기초월 행위는 분명히 보수주의를 이 땅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산업화의 열기 속에서, 열사의 사막에서 가족과 떨어져 땀을 흘리고 젊음을 불사르며 무에서부터 배와 자동차를 만들고 수출까지 한 것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방 후 50년 동안 힘들게 일하며 살아온 한국 사람은 몽땅 보수라는 것이다. 이런 아전인수를 보았나. 진보는 어디서 떨어진 천둥벌거숭이인가?

셋째,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 빼먹어서 보충한다. ^^) 이 사람들은 "보수가 일으킨"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매우 잘사는 나라인 줄 안다. 이렇게 훌륭하게 나라를 일군 보수 세력이 요즘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지금 북조선에 비해서 여러모로 형편이 나은 것 같다. 하지만 흔히들 착각한다. "요새는 밥 굶는 사람은 없잖아"라고. 없기는 왜 없단 말인가? 9시 뉴스에 심심하면 나오는 게 결식 어린이와 청소년 이야기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살 사건이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자살의 이유도 인생이 허무해서라거나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회의가 아니라, "경쟁에서 떨려나 당장 생계가 막막해서"다. 이대로 가자는 말인가?

마지막에 실린 ‘젊은 보수’ 정성환의 글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았다. 귀여우리만치 순진한 건지 줄타기를 교묘하기 하는 건지 모르긴 해도, 곧이곧대로 읽자면, 20대 보수주의자들이 이 정도만 생각하고 실천해도 매우 고맙겠다.

아래에, 책을 읽다가 걸리는 문장에 딴죽을 건다.

- 박효종의 글에서
36쪽, 인간은 향수와 낭만에 끌린다고 하면서 “최근 ‘뉴보이’가 아닌 ‘올드보이’가 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타지 않았던가.” 한다. 이걸 유머라고 썼겠지? --;

48쪽, “말을 탄 기수의 발을 안정적으로 받치는 등자가 발명된 것이 중세였으니”라고 했는데, 유럽 사람들이 등자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중세인 건 맞지만, 등자가 “발명”된 것이 중세라는 말은 틀리다. 고구려 사람들을 비롯해 동북아시아의 기마민족은 이미 5세기 이전부터 등자를 썼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말을 탄 무사가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자세는 등자로 몸의 균형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게르만족을 압박한 훈족이 바로 그런 자세로 싸워 유럽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고 한다. 

52쪽, 비보수주의, 반보수주의, 반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들이 수백만 청중을 동원했다면서 예로 "쉬리" "JSA"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를 들었다. 허허... "JSA"는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60쪽, “이념적 이단아 추방에는 아테네에서 유행했던 ‘오스트라시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외국어를 쓴 데가 많다. 그냥 도편추방제라고 하면 사전에서 찾아보기도 쉬울 것을.

104쪽, “가히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할 만큼 격렬한 진통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 이한우의 글에서
119-120쪽에서 한국의 방송사들이 “힘만 센 미숙아들”이라고 하면서 탄핵방송에 관해 “그들은 자신들의 일방적 편성의 근거가 국민의 70퍼센트 지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지지도가 20퍼센트대를 맴돌고 있는 요즘은 대통령 물러나야 된다는 식의 특집방송을 하루 종일 해도 괜찮다는 논리가 된다. 이게 말이 안 되듯 탄핵방송은 두고두고 한국 방송의 부끄러운 치부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고 한다. 노무현 지지도가 20퍼센트라고 해서, 나머지 80퍼센트가 노무현 물러나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흑백논리인가? 그리고 노무현의 이른바 ‘실책’에 대해서는 방송에서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것 같은데?

122쪽에서 “유감스럽지만 그 시대는 다 지나갔다. 특히 그 시대를 살면서 이렇다 할 ‘전력’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거세게 <조선일보>를 향해 달려든다. 전북대의 강준만 교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고 한다. 아니, 70-80년대에 어떤 ‘전력’이 없는 사람은 90년대와 2000년대에 조선일보가 보여주는 어이없는 꼼수를 비난할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140-141쪽에서 “일반적으로 좌파성향의 우리 현대사 개설서들은 ... 20년 가까이 진행된 역사 뒤집어보기, 거꾸로 보기 등의 결과로 지금은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에 의해 민주공화정이 이식된 것처럼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강만길 상지대 총장식의 ‘우리 현대사’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우선 사실(史實)과도 맞지 않다.”고 하면서, “3.1운동 후에 국내외에 세워진 대여섯 개의 임시정부 안에서도 ... 왕정복고를 염두에 둔 임시정부는 단 하나도 없었다. ... 대한민국이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마추어 좌파 역사평론가들이야말로 ...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를 스스로 개척할 능력이 없는 국민’인 양 매도해오고 있다”고 한다.
강만길 교수를 아마추어 좌파 역사평론가로 폄하한 것도 그렇고, 이 사람이 강만길 교수의 한국 현대사 책을 읽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좌파 역사서”에서는 해방 공간에서 한국 사람들이 민주공화정을 세우려 노력했던 걸 부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주적인 민주공화정 수립을 위해 애썼으나, 미군정의 개입으로 자주정부 수립이 좌절되었다고 쓴다.

- 김정호의 글에서
163-164쪽에서 “진보진영은 외국의 것들에 대한 폐쇄성도 드러내고 있다. ... 쌀도 그렇지 않은가. 진보주의자들은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한다. 한국 사람은 한국 농민이 재배한 쌀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한 차별이 어디 있는가. 만약 수도권 주민들이 경기도 농민들이 만든 쌀만 소비해야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과거 한때 전라도 지역에서 그랬다고 전해지듯이 그곳 주민은 해태제과의 제품만 사먹는 격이다. 그러면 경상도는 경상도 사람이 만든 것만 먹고, 충청도는 충청도 사람이 만든 것만 먹어야 하는가. 당장 여러분은 이것을 지역감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핫. 과거 한때 전라도 사람은 해태제과 제품만 먹었다고?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90년대 초반에 나는 전라도 시골 구멍가게에도 롯데제과 제품이 더 많아서, 아니 전라도 사람들은 지역 기업을 이리 홀대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부산 가보니 정말 해태제품은 찾아보기 어렵더군. 이 글의 요점은 그게 아니겠지. 그런데 시장경제가 생산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에 절대선이라는 사람이, 생산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이, 왜 ‘생산자’의 생존권은 무시하는지?

그리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시장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람이, 박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179쪽 “나는 박정희식 통치 모델이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첫째,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빠져 있던 당시의 국민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잘살아보세’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들은 그 부분을 잘 담아내고 있다. 둘째는 국가주의다. ... 셋째는 반공주의이다. ... 넷째는 개방이다. ... 나는 이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의 것은 박대통령의 공이었고, 두 번째의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첫 번째 잘한 일에 대해, 새마을운동의 방법은 유치하고 조악했지만 “당시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담벼락마다 소변금지, 낙서금지 글자가 필요할 정도로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지 않던 국민이었다. ... 자신이 노력하기보다는 남의 덕으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도덕률을 각인시킬 수 있을까. 국민 각자가 번 돈을 가렴주구로 뺏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믿게 만들 수 있었을까.”(180-181쪽) 한다. 허! 박통이 국민의 돈을 가렴주구로 뺏어가지 않았다고? 지금 박근혜의 재산, 그리고 새마을운동본부의 재산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세 번째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그가 집권할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였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까지 포함한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지금과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 박정희의 반공주의가 있었기에 당시의 척박한 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나마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182-183쪽)고 한다.
아니, 뭐든지 자유경쟁이 좋다면서? 그럼 사상이나 제도도 자유로이 경쟁하는 속에서 선택되어야 하지 않나? 박정희의 반공주의는 주의 표명에 그친 게 아니었다. 지식인뿐 아니라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노조운동은 왜 그 ‘자유’에서 배제되어야 하지? 엄청난 인권 유린의 역사를 간단히 “반공주의”로 얼버무리고 넘어간 데에는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185쪽에서는 심지어 “집권의 정당성을 논외로 한다면 그가 독재자인 것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당시는 누구나 다 독재자 아니었던가.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기업에서는 사장이, 후배에게는 선배가 모두 독재자였다. ... 그것을 독재라고 한다면 당시 우리 국민들의 생활모습 자체를 비하하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누구나 독재자였다고? 그럼 집안에서 아버지의 독재를 받는 어머니와 자식들은, 학교의 학생들은, 기업의 노동자들은, 그리고 어린 사람들은 다 사람도 아니었나 보지? 그것을 독재라 한다면 당시 우리 국민의 생활을 비하하는 거라고? 바로 앞에서 자기가 “당시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충분히 비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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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5-0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의 내공이 한껏 드러난 기가 막힌 리뷰입니다. 특히 딴죽을 건다고 쓰신 부분에서는 제가 한때 님과 술을 같이 마신 적이 있다는 게 영광으로 느껴지는군요. 아주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그려^^ 글구 저 도편추방제가 뭔지 몰라요... 하여간, 이 책이 나왔을 때 전 뻔할 뻔자라고 생각해 읽을 마음이 안들었어요. 님 리뷰 보는 것으로 만족하렵니다. 글구 강준만 교수에 대한 비판 말이죠, 그당시 싸우지 않았던 사람이 조선일보에 딴죽 거는 걸 뭐라고 한다면, 그때의 투사가 뭐라고 하는 건 겸허히 수용해야 하는 게 옳을텐데,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하여간 웃기는 애들이어요. 이 나라의 발전은 죄다 보수가 한 거라고 우기니, 세상에 이런 코메디가 있단 말입니까. 좋은 리뷰 감사드리고, 제가 요즘 님께 서운하게 했던 게 있으면 다 잊어버려 주십시오. 앞으로는 님께 잘 하렵니다. 저란 놈은 원래 강자에 약하거든요^^

숨은아이 2005-05-0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제게 뭘 서운하게 하셨단 말이어요? 흐음~ 자진해서 고백하세욧. ^^ 그런데 지금 보니 해야 할 말을 빼먹고, 또 실수도 몇 개 있어 고쳤어요. 칭찬 고맙습니다. 꾸벅.

릴케 현상 2005-05-0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경우 도무지 읽지 않을 책을 이렇게 꼼꼼히 읽고 인용까지 열심히!하시다니... 잘 읽었습니다. 책 안 읽고도 다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숨은아이 2005-05-04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에고, 아니에요. 이 책을 읽고 대체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니까요. ^^

비로그인 2005-05-1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논리 개발.. 숨은아이님. 멋져요^^ 하여튼, 정말 보수라고 말하는 그들이 스스로 위기라고 말하며 난리법석 떠는 그 모양새가 정말 정말 맘에 안 들어요--+

숨은아이 2005-05-1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아이, 제가 뭘... 고맙습니다. ㅎㅎ 그런데 그들, 요즘은 다시 기고만장한 듯...

로드무비 2005-05-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잘 쓸 수 없는 논리적인 글을 쓰시는군요.
추천 아직 안 늦었죠?
('올드 보이' 유머 무진장 웃겨요. 그것도 유머랍시고 써놓고 우쭐댔겠죠?ㅎㅎ)

숨은아이 2005-05-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에 때가 어딨겠어요. 고맙습니다. 부끄...

내가없는 이 안 2005-05-1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뒤늦게 읽었는데 너무 흥미진진해서 열심히 읽었어요.
이런 글은 숨은아이님이니 가능하죠. 저도 이런 글 쓸 수 있었으면. ^^

숨은아이 2005-05-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전 이안님처럼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