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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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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리얼리스트들은 카메라로 찍힌 피사체를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초점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카메라 뷰 파인더로 찍은 피사체는 가운데가 밝고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그림자가 생긴다. 이 작가들이 보여주는 그림을 보면 피사체를 캔버스에 옮기면서 의도적으로 사진에 생긴 음영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한 이유로 중앙의 밝은 피사체에서는 냉정하고 메마른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감정이 제거된 이론의 잔해가 보인다. 때로는 이러한 음영으로 인하여 관객은 더욱 뚜렷한 명암을 구분하기도 한다. 주변으로 밀려난 어두운 그림자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대중이란 휘몰리는 성질이 강해 밝은 중앙의 빛에 시선을 더 오래 두기 마련이다.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중앙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장막 뒤의 쓸쓸한 패배자의 쳐진 어깨를 보게 된다면 세상은 그에게 어떤 시각을 보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빛과 어둠의 교차와 태양의 강렬함과 폭풍속의 고달픔, 그림자에 관한 여러 가지 영상들이 머릿속에서 한 컷의 카메라에 담겨진 그림처럼 출렁거렸다. 한 개인의 삶이 역사와 고리를 연결하고 있는 운명적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밀물처럼 벅차오른다. 그들의 부평초 같은 삶과 우연하게 얻은 행운과 뒤 이어 악마의 혓바닥처럼 다가오는 불행의 그늘을 읽다보면 목구멍이 먹먹해진다. 유명인이었기에 더욱 가혹하고 잔인한 패배의 트로피를 들어야했던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갑자기 “인생은 허무한 한 편의 연극무대”라는 구절이 뒷골을 때리고 지나간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그 사람들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위대한>이라는 관용사를 아쉬운 마음으로 붙여주었나 싶다.


고맙게도 저자는 카메라의 중심부에서 화려한 빛의 감각으로 찍히는 사람들에게 보냈던 기존의 찬사 대신에 그 언저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제는 잊혀져 간 패배자들에게 따듯한 관심을 두고 있다. 인간의 소외와 그 과정을 알게 되면 그 대상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반대급부 혹은 여러 가지 상황과 그에 따른 가치에 보상으로 주어진 패배의 잔은 잔인하기만 하다. 이 책 중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의 잔을 마신 인물은 교만한 괴테에 의해 천재성을 의심받고 일찍 감치 소멸되어야 했던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와 시기심으로 짐승처럼 들끓은 스탈린에 의해 가족과 본인 자신까지 죽임을 당해야 했던 트로츠키의 인생여정은 차라리 계속되는 압제 속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극도의 한계성까지 거론할 지경이다. 아무리 실패에 대한 가치를 후대 역사에서 재평가해준다고는 하나 당대에서 당사자가 치러야 하는 좌절과 고통으로 찢겨져 나가는 패배란 독자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마르크스에 의하여 키워졌지만 시기심 많은 차기권력자에게는 무참하게 짓이겨 나간 장본인의 대표적 인물로써 권력을 향한 예민한 촉수가 부족했고, 자신은 무사할 것이라는 자만심도 불행에 한 몫 했다고 보인다. 가족을 모두 잃고 나중에는 이국땅에서 자신마저 이마에 침을 맞고 죽어야 하는 운명이란 권력의 무상함을 넘어 삶의 무상함을 일깨워준다. 허긴,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음 후이거나 고르바초프나 엘 고어처럼 생존했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야 책을 쓰는 작가에 의하여 주인공으로 등장한 경우다. 물론, 대부분의 패배자들은 게임이 완전하게 끝나기 전에는 상층부에서 권력의 칼을 휘두른 세력이다. 하지만 그들이 초라한 패배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그 여정을 읽다보면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아쉽다. 라살처럼 짧은 생애동안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면서 뛰어난 정치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연적과의 결투로 권총 한 방으로 서른아홉이라는 생을 마감하는 일은 한편의 연극공연을 보는 듯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를 통하여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니! 노동자가 국가 기구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스템은 민주적 선거로 행해져야 한다고 외치던 사람이 정작 본인 자신은 한 순간의 감정적 열정으로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일로 그는 한 순간에 현실을 뛰어넘은 사선속의 패배자가 되어야 했다.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른다.”가 이럴 때 쓰라고 생긴 말이겠다.


처칠이 “비록 적장의 장수였지만 위대한 장군이다.”라고 극찬을 한 사막의 여우 롬멜은 한 그릇된 독재자의 어긋난 파시즘으로 인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던 운명을 타고났다. 그가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자신의 독재자를 위하여 희생양으로 죽어야했고, 그러므로 지금도 퇴역한 2차대전 영국군 병사들은 그의 무덤 앞에서 거수경례를 정중하게 올린다. 패배자의 승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우다. 죽어서 위대해진 패배자가 될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것도 행운이다. 죽음을 통하여 행운의 위대성을 초월하여 영웅이 된 인물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체 게바라. 두려움 없이 혁명을 즐긴 것처럼 보이는 이 열정적인 남자는 말로만 떠드는 이론가들을 뒤로하고 한 개인이 실제로 몸을 던져 실패한 경우다. 살아서는 패자였지만 죽어서는 찬란한 영웅으로 신격화되다시피 한 게바라처럼 후대 역사가들에 의하여 카메라 앵글에 담기에 최고로 좋은 모델도 흔치 않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이젠 1천 원짜리 공책의 표지에서도 만난다. 이것은 무슨 반동인지 모르겠다. 그가 그렇게 혐오하고 목숨을 걸어 평생 싸웠던 그 자본주의라니.


왕이라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사라진 착한 왕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권력욕을 불태움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비운의 여왕이나 모두 역사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패배자라 부른다. 정권의 상층부에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편의 손에 의하여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역사는 무대 위에 끝까지 남은 사람을 향하여 조명을 밝게 비쳐주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인정한다. 인정머리 없는 세상. 동생 토마스 만에 의하여 자신의 재능을 묻혀야했던 불우한 형 하인리히 만은 성공한 동생에게 이런 한탄을 한다. “너는 바쁘겠지. 하지만 나는 아주 한가해!”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패배자들을 위로한다. “승리자들에게는 박수갈채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상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니까”-(302쪽) 하지만 나는 저자의 동정심 어린 이런 말에 약간의 의문을 지니고 있다. 노련한 기회주의자 덩샤오핑이나, 히틀러라는 악마의 존재로 인하여 그 상대성으로 성공한 처칠의 경우, 또는 어떡하든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던 닉슨 같은 사람을 패배자의 명단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다 싶다. 그들은 비록 사전오기나 칠전 팔기식의 오뚝이형이었지만 그들의 끝은 나쁘지 않았다. 저자의 말처럼 패배자란 편안한 성격을 가졌거나(이것은 권력욕이나 성공욕이 상대방에 비하여 약한)아니면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범하는 부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다.(양보심이 많은) 물론, 히틀러를 찬양한 크누트 함순이나 막시밀리언 황제처럼 죽어서도 웃음거리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저자가 말하는 패배자의 형상은 그렇다.


그래서 가진 의문은 처칠이나 덩샤오핑, 닉슨 같은 이는 진정한 패배자라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의 평가는 여전히 좋고 그름으로 양분화 되어 있는 팽팽한 상황이다. 여기에 페레스토이카를 외치던 고르바초프도 포함될 수 있겠다.


여하튼,
“백과사전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거칠고 비정하고 역겨운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383쪽)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좌절 속에서 스러져 간 많은 패배자들의 이름을 따로 만들어 놓은 대형 백과사전은 왜 안 만들고 있는 건지 출판계에 궁금증을 던진다. 만약에, 실패한 패배자들과 성공한 사람들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오감이 펄떡펄떡 뛴다.


이 책은 총 26명의 패배자를 들추어 낸 것뿐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느 그늘진 구석에서 피어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천재들과 뛰어난 인간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비정규직과 인종차별, 성차별로 그늘을 드리우는 것도 모자라  가난과 질병 속에서 소외받고 멸시받는 인류의 수 많은 패배자들...그럼에도 26명의 패배자 이야기라도 알게 되었으니 패배자의 쓴 잔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우울하다. 비록 저자의 출신지역인 유럽과 미국 태생의 인물만을 추려서 다룬 책이지만 정치, 군사, 문화, 물리학자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선별해서 다루어 싫증은 나지 않는다. 단, 깊이 있음을 너무 기대하시지는 마시길. 맛보기로 재미있다는 말은 확실히 할 수 있겠다. 번역이 그 역할을 십분 발휘해 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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