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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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도 이런 글이 나온거 보면 삶은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고 그때보다는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을까 위안 삼아본다. 라 보에시는 33세 젊은 나이에 죽고 이 책은 그 당시에 출판되지 못했다고 한다. 재판관이자 철학자였던 그의 독재자를 고발하는 글은 그 당시에도 너무 파격적이었나보다.


개인적으로 번역가인 심영길의 글이 더 흥미로웠다. 파리코뮌 내용을 읽으며 광주항쟁이 떠올려 뭉클했다. 
왜 사람들이 독재자에 모여드는지 이솝 우화 '늙은 사자와 여우'에 잘 나와있는 것 같다. 라 보에시가 말하는 '자발적 복종'의 가장 큰 이유는 망각과 습관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류는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 직접 경험을 못했더라도 매스컴으로 글로 알 수 있다. 이런 간접적 경험도 중요한 것 같다. 결국 독재자의 권력은 우리 모두가 기꺼이 내준 권력이다. 복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끊임없이 권력을 감시하고 딴지 거는 것. 이것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유를 잃으면 용기도 잃고 만다. 종속된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열의도 다부진 결기도 갖지 못한다. 독재자에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친구와 우애, 정의. 우정은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싹트며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통해서만 자란다. 우정은 물질적 호의가 아니라 고결한 삶의 태도에 의해서 유지된다. 친구 간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정직함을 알기 때문이다. 우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반듯한 성품과 믿음 그리고 변치 않은 태도다. (125쪽) 잔혹함 배반 불의가 판치는 곳에서 우정은 싹틀 수 없다. 악인들이 모이면 그들 사이에 동료는 없고 음모만 생겨난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고 공범이다. 독재자에게는 친구가 없다. 그들은 이미 우정의 범주 밖에 있다. 우정의 불문율은 열매를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며 부조화 속에 비틀거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의 최후는 항상 안좋았다. 이걸 알면서도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든 추종한다. 

"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에게 무엇을 뺏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선사시대에도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역사시대에도 갖은 압제에 맞서 억압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선지자가 쭉 존재했다. 이 자명한 질실이 우리에게 확신과 희망의 영토를 넓혀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반공주의는 독재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다. 무관심은 모든 불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균형과 화합, 즉 평등과 우애가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사회적 질서란 통치 세력과 피통치 세력 사이에 균형관계가 성립되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관계의 성립은 보다 고차원의 원칙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민중의 이상적 질서는 정부와 시민 사이에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사회다......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하낟.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카뮈 콤바)


"독재자의 가장 패악적인 범죄는 민중을 우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의에 무지하고 무감각하게 민중을 길들이면서 선량한 국민으로 교화하는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교모하게 둘러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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