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1979년)은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이나 정인숙 피살사건(1970년)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꼽힌다.

김형욱 사건은 폭력집단이나 북한, 또는 국가권력 등 납치 실체에 대한 의문점못지 않게 국가권력이 자행한 것이라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배후인가 아니면 그와 충성경쟁을 벌이던 차지철 경호실장의 소행인지 여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김형욱 전 부장은 10.26 3주 전인 79년 10월 7일 오후 7시 프랑스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당시 54세) 실종됐다.

역대 중앙정보부장 중 최장수인 6년 3개월간 막강한 자리를 지키다 전격 경질된 김형욱은 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중이던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 나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표적이 됐다.

그는 실종 전 항공편으로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 특급호텔인 리츠호텔에 머물다 2류 호텔인 웨스트앤드 호텔로 옮긴 뒤 카지노에 들렀다가 행방불명 됐다.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이 3공화국이나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출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7∼79년 윤일균 당시 중정 차장(해외담당), 이용운 전 해군제독(작고) 등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밀사로 미국에 보내 1백50만달러 제공, 여권보장 등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막후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욱 사건은 4반세기를 지난 지금도 파리에서 중앙정보부원에게 살해되어 무거운 추에 매달려 센느강에 던졌다느니 비밀리에 청와대로 압송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사살당했다 등의 구구한 억측만 자아낼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씨는 199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84년 10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는 실종선고 판결을 받은 뒤 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결정 후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형욱 실종사건의 핵심은 국가권력의 개입여부, 마피아 등 조직범죄 집단이나 북한의 개입 가능성 등 배후세력의 실체에 모아진다.

범행 주체를 둘러싼 논란에서 카지노와 관련된 폭력집단이 금품을 노리고 범행을 했거나 북한이 관련됐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국가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가장 높다.

◇ 김형욱 실종사건 관련 일지

- 73년 미국 망명

- 1979.9= 김경재(金景梓) 전 의원, '박사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 '권력과 음모' 출간.

- 1977.6.22= 김형욱,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증언

- 79.10.7= 저녁 7시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뒤 실종

- 82.3= 궐석재판에서 '반국가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형 선고. 전재산 몰수.

- 91년 = 서울가정법원, '84년 10월8일 사망으로 간주'한다는 실종 선고 판결

- 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 결정 이후 형사재판에서 무죄 선고.

- 98년 = 부인 신영순씨, 법정투쟁 3백억원으로 추정되는 재산 되찾음

duckhwa@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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