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민족은 양반들뿐만 아니라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들조차도 귀족의 티가 흐른다. 체격과 외모 면에서도 일본인, 중국인들과 비교해 매우 귀족적이다. 특히 여성들은 일본,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미모가 뛰어나다. 또한 머리 전체를 뒤로 땋아 넘긴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은 헝가리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과 매우비슷하여 퍽 인상적이었다.”
1929년 발로그 베네데크 바라소시(1870~1945)라는 헝가리 민속학자에 의해 부다페스트에서 출판된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단행본의 일부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 한국을 깊이있게 연구한 헝가리인 학자가 있었으며, 그가 부정적으로왜곡되게 알려진 한국과 한국인의 실상을 바로 알리기 위해 저서 등을 내며 노력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헝가리 육군사관학교에서 동아시아 정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초머 모세가 4일 중국 베이징(北京)대학에서열리는 제2회 세계한국학대회에서 바라소시의 업적과 활동을 소개한 논문을 통해 밝혀졌다. ‘헝가리 최초로 깊이있게 한국을연구한 학자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가는 그의 저서’란 제목의 논문에서 초머 모세는 20세기 초 헝가리 내의 한국에대한 인식, 바라소시가 한국을 여행하고 연구하며 저서를 낸 이유, 그리고 바라소시의 한국에 대한 애정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바라소시가 한국을 연구한 이유〓초머 모세의 논문에 따르면바라소시는 헝가리 귀족출신의 민속학자. 마자르족인 헝가리 민족과 한국, 일본, 만주족 등 동아시아 민족은 오래전 같은 장소에 거주했던 친족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20세기 초 헝가리에서 크게 유행한 투란(TURAN)사상에 심취했다.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일본에서 일본 역사와 문화, 언어 등을 연구했던 바라소시가 한국을 여행하며 한국을 연구한 것도 투란사상에 기초해 한국과 일본, 중국의문화와 언어등을 헝가리와 비교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헝가리인의 한국 인식은 아프리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보다 못했다. 학자나 여행가의 저서에 짧은 기록으로 언급된 한국은 지극히단편적이고 편협한 시각으로 그려졌다.
◈바라소시의 한국 여행〓1907년 동아시아 연구를 위해 두번째블라디보스토크에 왔던 바라소시는 첫 여행에서 만난 한국 상인을 재회, 끈질긴 부탁끝에 그와 동행해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들어온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로 당초 목적지인 원산에 가지못하고 어느 강가에서 배를 내렸던 그는 인근 사찰 스님의 도움으로 서울까지 여행, 한국의 역사와 문화등을 ‘코리아, 조용한아침의 나라’라는 저서에 담는다.
일본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그는 여행 중 통역가의 도움을 받아 노승과의 대화를 즐겨하며 한국의 역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아시아의 발전된 문화가 어떻게 한국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는가도 이해했으며,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만행과 일제의 한국통치가 한국에 얼마나 큰 비극과 시련이었는지도 깨닫게 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뿐 아니라, 자연 생태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일제에 의해 빠른 속도로 파괴돼 가는 숲을 보고 안타까워했고,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한국을 일본이 노리는 이유도 알게 된다.
◈바라소시의 한국을 위한 활동〓 바라소시는 1922년 일본에서투란연맹을 조직, 한국과 일본, 만주 등의 대표를 일본에 초청,연맹 행사장에서 태극기를 게양한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의해태극기가 내려지고 한국 대표의 발언이 봉쇄되자, 그는 행사 뒤연회장에서 한국대표의 발언권을 최우선적으로 부여한다. 특히‘코리아…’를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부정적으로 왜곡된 한국을바로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코리아…’의 마지막 부분에이렇게 적는다.
“나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코리아는 머지않아 이 힘든 상황을 분명히 극복할 것이다.
코리아는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살 것이다.”
초머 모세는 논문에서 “(바라소시가 세상을 떠난 뒤)헝가리가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등 어수선한 시대상황에 떠밀려 그는자신의 저서와 함께 잊어졌다”며 “소량 출판된 그의 저서도 대형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힘든 희귀도서로 전락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