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 일본군'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일본군위안부 증언집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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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 내 운명을 나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64쪽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소학교 입학원서 받고 사흘 동안 학교를 못 갔다. 아버지 장레식 치르느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 복동이는 어떻게든 공부시켜 사람을 만들게. 우리 복동이가 보통 애가 아니다." 

엄마가 약속을 못 지켰어. (68쪽)


죄는 업보가 되어 돌아오니까. 지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라도. 


전생을 듣고 나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는 김복동 할머니의 말이 너무 가슴 아프다. 그렇게라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드니까. 왜 자신한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전쟁 때문에, 태어난 시기가 하필 그런 야만의 시대라....

누구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전생의 죄를 다음 생에서 갚는 건 있으면 안 된다. 죄를 그 생에 지었으면 그 생에 벌을 받는게 맞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런 짓을 한 일본인, 일본 정부가 벌을 받아야 한다. 잘 먹고 잘 살면 안된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때 끌려갔고, 일본 군인에게 담배를 비웠다. 

싱가포르 제10육군병원에서 간호 훈련을 받았고 이종 언니 남편이 찾아왔다. 


"처음 보는 이종 형부를 붙잡고 울었어, 통곡했어.

그이는 부산이 고향으로 어부였어. 

대동아전쟁이 나고 전 재산인 배를 일본 군인들에게 빼앗겼어.

군속이 되어 남양 군도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가 그이를 찾아왔다고 했어. 

엄마가 내 사진을 그이에게 주면서 그랬대.

내 딸이 남양으로 간 것 같으니 거기 가면 수소문 해보게.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내 딸이 살아 있으면 꼭 찾아서 데려오게.

그래서 나를 찾으려고 조선 여자가 있다는 곳은 다 뒤지고 다녔다고 했어. 

싱가포르에서 해방을 맞은 그이는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지내고 있었어." (116쪽)


미군포로수용소에 1000명 정도 있었다. 흑인을 처음 봤다고 한다. 처음으로 낮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배는 부산 제2부두 앞바다에 도착하고  콜레라 의심이 되어 보름이나 기다렸다. 


이종 오빠하고 이종 언니가 통통배를 타고 왔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서로를 향해 손짓, 발짓을 하며 울었어. 이튿날 이종 오빠하고 이종 언니가 밥, 김치, 고추장 같은 먹을 걸 줄에 매달아 배 위로 올려보내주었어. 사람들과 그것들을 나누어 먹었어. (121쪽)

 

"창고 같은 곳에서 나가니까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흰 한복을 입고 엄마 손에 두부가 한 모 들려 있었어. 엄마가 울고 있었어. 엄마 얼굴도, 내 얼굴도 변해 있었어. 엄마가 내게 두부를 내밀었어. "먹어라..."

두부를 받아 입으로 가져갔어. 먹을 수가 없었어.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와서." (122쪽)


1991년 9월 18일 '정신대 신고 전화'가 개설되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1월 17일 정신대 신고를 했다. 


다대포 앞바다에서 횟집을 했다. 부산 다대포엥 셋째 언니가 살았다. 부산에 갔다가 미군 포로수용소에 함께 있었던 여자를 만났다. 요시코와 미에코는 부산 남포동 유곽에 있었다. 


1995년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들렸다가 우연히 '일본의 간호부들'이라는 사진을 봤다. 그 속에 김복동 할머니가 있었다. 


자식을 낳는 게 소원이었던 김복동 할머니. 하지만 어렸을 때 맞았던 606호 주사가 불임 주사였다는 걸 몰랐다. 여섯 번이나 맞아야 한다고 ㅐ서 606호 주사라 불렀다. 


보따리 장소도 하고 통도사 아래 언양까지 장사하러 다녔다. 장사해 번 돈을 전부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는 그 돈을 다른 딸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는 돈을 벌기만 했어, 가지려고 하지 않았어. 


"돈 벌어서 뭐 할래, 나 좀 주라. 너는 아무도 없지 않니." 

언니들이 했던 말.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없는 사람이 어디있나?

"그 말이 나를 아무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족이 어떨 때는 더 잔인하다. 힘든 일을 겪은 동생을 보듬지 않고 외면하다니...


김복동 할머니는 1년 여 암 투병을 끝에 2019년 1월  28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33690&cid=43667&categoryId=43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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