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 우리 안에 스며든 혐오 바이러스
박민영 지음 / 북트리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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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가 난무하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민중이 고통, 불안, 분노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는 얼마든지 개혁과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다. 그러나 그 공격적 에너지가 제도적 문화적으로 용인된 방향으로 분출되다 보니 혐오로 귀결된다. (13쪽) 책을 읽다보면 혐오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금융위기 (IMF)와 맞닥뜨린다. 결국 혐오 표현은 불안한 미래, 생존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극심한 경쟁, 입시 때문이다. IMF로 실직한 부모들을 본 세대는 연대, 혁명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공포 세대가 자신의 안위를 확인하는 방편 중 하나는 자신보다 못하거나 약한 사람(집단)이 있음을, 혹은 없으면 억지로 만들어 내서라도 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자신보다 못나거나 약한 사람을 조롱하거나 공격하고, 상대방이 그런 조롱과 공격을 그냥 감내한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자신의 서열을 확인하고 우월감과 안도감을 갖는다. 서열화가 심한 사회에서 약자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것은 서열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징표다. 그러므로 조롱과 공격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이다. (33 쪽)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계급 상승의 사다리가 거의 다 끊어져 버렸다. 추락에 대한 공포만이 가득한 세상,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본모습이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약자를 모욕함으로써 추락에의 두려움을 불식시키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일시적으로 위안을 얻고, 피폐한 자존감을 일으켜 세운다. 혐오가 창궐하는 이유다. 


문제는 혐오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혐오는 약자에게 사회적 스트레스를 전가시킬 뿐이다. 혐오는 그 자체로 건설적인 논의를 봉쇄한다. 건설적인 논의는 서로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혐오 메커니즘은 평등한 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혐오를 통해 일시적 스트레스 해소, 남을 놀리는 데 따른 일시적 쾌감과 재미를 추구할 뿐이다. (11쪽)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을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졌다. 10대 20대는 오랫동안 생존에 대한 공포, 성공에 대한 강박, 무력감에 시달렸다. 21세기에 생존을 고민해야하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정치권에서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제대로 일 좀 하세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칼 마르크스)

여전히 이것만큼 지배세력을 두렵게 만드는 말은 없다.  혐오에 대응하기 위한 언어도 중요하다. 소위 프레이밍이라고 한다. 무상 급식 대신 보편 급식, 국민 급식, 돌봄노동 대신 기반노동 등 언어 선택에 있어서 정치권이 좀 더 심혈을 기울이면 좋겠다. 


당장으로는 차별금지법 제정,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비례한 가중처벌 조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혐오에 대한 '메타 지성'이 필요하다. 지식인들이 죽은 사회에서 메터 지성 담론이 얼마나 발전할지는 의문이지만....


박노자는 영화 기생충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이 영화의 제일 중요한 테마는 불평등의 내면화, 그리고 연대의 불가능성이다. 반지하에 살아야 되는 두 가정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는 겁니다. 연대가 되는 한계가 어디까지냐 하면 가족까지입니다. 통치의 기본은 분할 통치다. 민중이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쪼개져 서로 헐뜯는 구도만큼 통치하기 편한 상황은 없다 - P12

윤리적 감수성, 미디어 리터러시 media literacy, 서열화, 소비, 뷰티 산업, 문제 생산자, 하향경쟁, 선택당하기, 무식한 대학생, 세대 착취는 없다,

사회에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복지의 대상이 된 것이 ‘특혜‘라는 논리는 뒤집어 보면, 사회 기여도에 따라 복지를 누릴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복지를 각 개인의 사회 기여도에 따른 국가와의 거래가 아니다. 국민의 삶의 질에 대해 국가는 책임질 의무가 있으며, 복지는 이를 위해 생겨난 제도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설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복지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P22

세상을 바꿀 현실적인 힘은 86세대가 다 갖고 있으면서, 왜 우리더러 세상을 바꾸라고 닦달하는가. 세상을 바꾸려면 당신들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청년 세대에게 내주면 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으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보수 기득권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사회의 짐을 우리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그 부담에서 빠져나가려는 의도 아닌가.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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