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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보낸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장혜영 지음 / 우드스톡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다큐를 보고 싶었는데 책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가족 중에 발달 장애인이 있어서 저자의 탈시설 노력에 공감이 갔다.
왜 굳이 장애인끼리 격리해야 할까?
그냥 아픈 사람,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요양원에 있으면 되지, 굳이 장애인끼리 모아놓아야 하나?
장애인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어서, 장애계 내에서도 얼마나 구분짓기와 차별이 심한지 알고 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발달장애인 등등 서로 연대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학교 때 다니던 학교가 통합교육을 해서 그런지, 발달 장애인 학생이 우리반에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만 해도 차별이 심하진 않았던 것 같다. 서로 이해하려고 했다.
중학교라서 그랬을까? 고등학교였으면 달랐을까?
자연스럽게 장애인, 비장애인 어울러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한다.
최근 저자의 근황을 보니 정의당 비례대표 청년 정치인으로 영입되었더라.
유튜브 : https://youtu.be/T9tOHwIab78
결국 장애관련 정책을 바꿀려면, 정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구나...
활동보조인 관련 공약을 내세우는 것 같다. 정말 필요하다.
차별이 너무 당연한 우리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그 차별의 벽을 없애고
스웨덴처럼 장애인 수용시설이 모두 폐지되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저자가 세바시에서 한 강연도 인상적이었다. 기교는 없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근데 정의당 위원으로 나왔을 떄와, 세바시 나왔을 때 인상이 많이 다르다;;
세바시: https://youtu.be/T3IluuOr0G0
무섭게 소리치는 사람들 앞에서 과거 우리 부모님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존재를 문득 발견했다. 그것은 내 삶을 위해 나보다 연약한 사람의 삶을 쳐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속삭이는 세상 그 자체였다. ...이곳을 보라고, 여기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이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너 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하는 이 세상의 목소리가 시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르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한 껏 세상의 구석으로 밀쳐져 이제는 거의 잊힌 한 무리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장소였다. 시설을 한 번 들어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안전하게 죽음에 이르도록 보호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혜정이에게 주어진 것은 인간다울 권리가 아니라 그저 ‘고마운 줄 알아야 하는‘호의였다. - P34
마치 이 세상 전체가 혜정이가 그냥 시설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결구 끼댈 곳은 우리 자신밖에 없었다. ...물론 이렇게 당락을 운에 맡겨야 한다면 그것은 도박이나 복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복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 하더라도 혜정이의 탈시설은 내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양보할 수 없는 인간성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였다. - P51
모든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다른 사람들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타고난 환경으로부터 인위적으로 격리되어 타인이 규정해 주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다.
약점이 반드시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약하다는 것을 단순히 취약한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약하다는 것은 그저 연약하다는 뜻일지 모른다. 연약하다는 것은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 섬세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일지 모른다.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늘 섬세하게 바라보는 연습아다....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언젠가 내가 연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 P95
노들야학...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 P107
이 세상은 누구라도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장애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효율과 경쟁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 오랫동안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살아남는 것은 혼자서 하는 일이라는 각자도생의 철학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개인의 능력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게 된다. 나보다 능력이 좋은 사람을 우러르고 능력이 모자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런 세상에서 상대적 약자를 돕거나 돌보는 것은 ‘가진자의 여유‘이거나 ‘숭고한 희생‘으로 치부한다. 내 한 몸도 살아남기 힘든 마당에 감히 누가 누구를 돌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내 한 몸도 살기 힘든 세상이기에 남을 돌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나만이 나를 돌보는 세상은 제아무리 잘난 개인이라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 P150
세상이 각박하고 살기 힘들수록 서로 의존하고 돌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튼튼한 버팀목이다. 혼자보다 둘이, 둘보다는 셋이 서로 의지할 때 버티는 힘은 훨씬 더 커진다. 사회 구성원 간의 촘촘하고 튼튼한 연결은 모두의 삶을 알뜰히 떠받치는 안전망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를 시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출반 선상에서 인생을 시작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사회에는 분명히 태어나자마자 상대적으로 ‘더 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을 더 괴롭게 하는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다. 삶의 다양한 존재 양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특정한 삶의 양식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이 사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 P151
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든 것은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세상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비장애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 비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운으로 얻은 것을 장애인들에게는 능력으로 쟁취하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차별적인 일이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신념을 가졌다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는 명백한 상식이어야 하며 결코 시혜나 호의로 격하해서는 안 된다. 비장애인만을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회에 맞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장애인들은 거의 모든 수간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을 오롯이 장애 당사자와 그 가족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은 잔인하며 정의롭지 못하다. 이는 결국 개인과 그 가족을 파괴하고 나아가 그 사회의 인간성 자체를 상처 입힌다. - P151
타인의 고통을 대함에는 예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심사의 이름으로 그 어떤 무지도, 무례도 용서되는 듯했다. 인간으로서 혜정이가 겪어온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심사‘라는 이름으로 혜정이의 삶, 나아가 우리 가족의 삶 전체를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 P160
지금의 복지 시스템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은 채 장애인을 대하고 있다. 국가에게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라 ‘몸‘이다. 국가는 마치 자동차 수리비를 지원하듯 개별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국가가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심사하여 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장애인 복지를 삶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로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와 장애인의 삶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장애는 개별 장애인의 삶 속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삶을 살고 있는 장애 당사자이고 다음으로 그를 돌보는 주변 사람들이다. 심사가 아니라 대화를 해야 한다. - P165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혜정이의 소음인지 아니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인지 도무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조심하는 마음이 지나쳐 오히려 오해를 부른 것 같다며 사과를 전한다는 답장을 읽자 긴장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다. - P181
이런 일들이 종종 생길 때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이 예술을 향유할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 곧 비장애인의 예술을 향유할 권리를 침범하게 방치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의는 이미 장애인을 사회의 다양한 공공장소 밖으로 밀어낸 현실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현재의 차별적인 분리 상태를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기에 벌어지는 것이다...오랫동안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며 형성된 환경에 익숙해진 나머지 전혀 의도치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차별을 해 왔으니 앞으로도 차별을 지속하고 싶다‘고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 사회 곳곳에 있다. 나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어떤 환경이 실은 완전에 가까운 차별을 통해 구축된 것일 가능성이 있음을 늘 의심해야 한다. - P184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는 사고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이중잣대를 갖기 않으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들일 가치가 있다. 우리는 비장애인들이 공연장이나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비장애인의 문화 예술 향유권을 사전에 적절히 규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인들에 대해서는 무언가 사전적인 규제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대결 구도에 선 존재가 아니다. 함께 살아갈 수 있으나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P185
일본 다큐 <치즈루> http://www.chizuru-movie.com 아카사키 마사카즈 <플러스 핸디캡> 일본 웹진 인터뷰, 함께 있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실천을 찾아야 하는 숙명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해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답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 P214
신념이란 실천하는 만큼 진실해진다는 것이다. - P218
2018년 5월 이룸센터에서 한국장애학회 발제문 박숙경 교수 "탈시설화 정책은 30980명의 사람에 관한 30980개의 정책이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원칙이다. 원칙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폐기할 수 없다. 그렇게 엄중한 가치잉기에 원칙의 자리에 올라있는 것이다. 현실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폐기할 수 있는 원칙이라면 처음부터 원칙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회 이 시대에 인간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가장 강한 인간이 아니라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연약한 인간이다. 그의 삶이 우리 사회 ‘인간‘의 척도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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