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학창 시절, 미술 수업을 이렇게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술은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보다.

미술 사조가 왜 생겼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갔다.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등

19세기 미술 거장들이 왜 거장인지, 이들이 그림이 왜 파격적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미술가는 칸딘스키, 마네, 뒤상, 고갱.


1.  고갱, 원조 퇴사학교 선배

고갱은 한 달에 페루로 가고 여섯 살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10대 고갱은 선원이 되어 5년을 항해한다. 

어머니가 둘아가자,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후견인 아로사의 소개로 증권중개소에 일하게 된다. 10년 동안 증권맨으로 착실히 산다.

주말에 파리 근교로 나가 그림 그리기 시작한다. 미술학원도 다닌다. 그림 그리기 7-8년 되던 해에 전시회도 연다. 그 전시로 인상주의자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취미생활을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골로 이사한다. 

"지금 나는 용기도 재능도 부족하다. 곡물 창고로 가서 목을 매는 게 낫지 않은가 매일 자문한다. 그림만이 나를 지탱해준다."

야생과 원시로 콘셉트를 잡은 고갱은 타히티로 간다. 


2. 마네의 올랭피아

마네는 땅 부자 귀족의 자제로 할아버지는 시장, 아버지는 판사였다. 전통방식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마네는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모사하며 연구한다.  살롱전의 신봉자인 마네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 영향으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선보인다. 그 이후 <올랭피아> <폴리 베르제르 바> 등은 모네의 인상주의, 입체주의에 영향을 준다.


3. 바람둥이 칸딘스키

칸딘스키는 부자 집 아들로 러시아 제일의 명문 모스크바 대학 법학과를 나온다.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법학과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뮌헨으로 간다.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세운 칸딘스키는 1902년 입학한 뮌터와 만난다. 칸딘스키는 비록 사촌과 결혼했지만 뮌터와 열애를 한다.  둘은 5년 동안 유럽을 순회하며 그림을 그린다. 칸딘스키는 1912년 '청기사'를 만든다. 1911년 아내와 이혼하지만 뮌터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뮌터는 1957년 자신이 소장했던 100여 점의 청기사파 작품을 모두 기증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청기사파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해 불살라 버렸다. 다행히 뮌터는 무르나우 집 지하실에 작품을 숨겨놓은 후 책장으로 입구를 막아버린다. 


4. 천재 뒤샹

뒤상은 1904년 파리에서 풍자만화가로 활동한다.1910년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은 뒤상은 '움직이는 입체주의'를 선보인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II>는 전시 배제를 통보받는다. 그 이유는 입체주의를 위배한다는 것이다. 기존 세력에 따돌림당하고 자유로운 창작을 억압당한 뒤샹은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모순점을 발견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개방적 진보적이라 말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되면 보수적 폐쇄적이 되어 새로운 미술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회화는 끝났다'고 생각한 뒤샹. '생각하는 미술' 즉 개념 미술을 탄생시킨다. 

<자전거 바퀴> 무의미한 미술이 도래.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

1915년 미국에 도착한 뒤샹은 레디메이드 작업을 한다.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 디렉터로 임명된다. 그리고 같은 해 <눈 먼 사람>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샘>이라는 제목으로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으로 변기를 출품한다. 논란의 중심에 놓인 <샘> 잡지 <눈 먼 사람> 2호에 익명의 사설이 실린다. <샘>이 거부된 이유를 나열한다. 이로써 레디메이드 개념이 뉴욕 미술계에 뿌리내리게 된다.

1923년 뒤샹은 체스에 올인한다. 1932년 국제체스연맹 대표가 되고 체스 관련 책까지 출간한다. 1933년 체스의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듣는다. 1934년 다시 미술계로 복귀한다.



1897년 서른 다섯의 클림트는 빈 미술 권력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싸우면 승률이 높아지겠죠? 그는 뜻을 함께할 동지를 모읍니다. 그리고 빈 미술가협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미술 그룹을 만듭니다. 그룹명도 주류 미술 세력에서 분리되겠다는 의지를 담아 ‘분리주의‘ 그룹이라고 짓죠. 분리주의 전시관 제체시온
분리주의 정신은 곧 에곤 실레, 오스크 코코슈카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들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기(요람)>- P103

철학자 니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인간은 3 단계로 정신이 진화한다고 말합니다. 1단계는 삶에 놓인 고통이라는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갈 수 있는 끈기정신을 가진 ‘낙타‘입니다. 2단계는 단순히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문제와 싸우는 투쟁 정신을 가진 ‘사자‘입니다. 궁극의 3 단계는 1-2 단계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만들어내는 창조정신을 가진 ‘어린아이‘입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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