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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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요코를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일흔 살에 돌아가서 더 이상의 사노요코의 책을 읽을 수 없지만, 나이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장수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노년이 어떤 의미인지, 노인으로 사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1938년 베이징에 태어나서 베를린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두 번 결혼하고 아들이 있고 유방암에 걸려 예순일곱에 수술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1년 동안 한국 드라마에 빠져 살면서 턱이 틀어졌고 암이 뼈에 전이된 것을 알고 바로 재규어를 샀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참 멋있다.


그녀의 문체는 냉소적이면서 담담하고 웃음을 자아내고 슬프다. 자기 세대는 끝났다 하면서 할 말은 다 한다. 

왜 나이들면 불쑥불쑥 화를 내는지, 옛날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는지, 체면을 차리는 상황 등을 설명해 준다.


나도 만약 일기를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왜 일본 중년 여성에게 겨울연가, 욘사마, 한국 드라마가 인기였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수십 종류의 머플러를 선보인 욘사마에 빠지고, 드라마에서 툭 하면 미국 유학을 가는 주인공들이 신기하고, 사랑을 믿는 한국사람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작가가 얘기했듯이 일본 사람에게 한국 남자는 희귀한 존재였다. 모든 것에 정열적으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의 눈에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다. 겨울 연가에서 박용하의 역을 스토커로 표현한 것도 의외였다. 일본에는 그렇게 집착하는 남자가 없나보다. 조용한 집념의 나라 한국. 외국 사람들은 한국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겨울연가 때문에 난생처음 DVD를 사게 된 저자가 너무 귀엽다. 절대 무언가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작가에 그 이후 DVD를 수집하는 취미가 생겼다. 한국 드라마 때문에 남이섬도 갔고 제주도도 갔고 판문점도 갔다.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일제시대 일본의 만행도 알게 되고, 저자는 솔직히 본인의 무지를 시인하면서 진심으로 부끄러워 한다. 이게 대다수 일본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냥 다른 나라 특히 아시아에 관심이 없을뿐이다.


위키피디아 : https://en.wikipedia.org/wiki/Yōko_Sano

인간은 생산적이어선 안 돼. 쓰레기나 만들 뿐이니까. 난 불가연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 P42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지나치게 많지만 사사코 씨에게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지나치게 많다. - P45

- 나 예뻐?
- 넌 그걸로 충분해요.
-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 P109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다르다. 이 행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가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 P126

아줌마들은 외롭다. 할 일이 없다. 인생은 이제 내리막길이다. 몸이라면 더 이상 안 써도 괜찮다. 귀찮고 성가시다. 하지만 사랑은 받고 싶다. 애정으로 한가득 채워지고 싶다. 한국 드라마의 남자는 일본 남자라면 부끄러워할 만한 일을 태연하고 당당하게 해치운다. 장미꽃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서도 이름을 부르며, 눈이 먼 여자를 위해 목숨을 끊어 자신의 각막을 이식한다. 이성은 모순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성은 모순의 마그마다.
한국 부모의 강압적이고 이기적이며 타산적인 태도는 정말로 극성맞다. 일본 아줌마들이 한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행동을 한국 아줌마들이 대신 해준다.
정이란 정을 있는 대로 다 쓴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 P137

외로운 독거노인은 주변에 화낼 소재가 떨어지면 천하와 국가를 논하며 울분을 토한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살날이 얼마 없으니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다. - P187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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