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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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라는 존재는 참으로 신묘하다. 

이 책에서 피아노를 가지고 풀어낸 이야기의 수많은 타래들이 보여주듯, 악기 하나를 배우고 싶어하기 시작해서 이윽고 배우게 되고, 그것을 마치 제 자식처럼 매일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때로는 패대기를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이뤄나가는 대장정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내가 굳이 '신묘하다'는 이상한 말로 이 리뷰의 첫 문장을 내뱉은 것에 공감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호기심으로 인한 지적 열망, 맨 처음 만져보며 느끼는 희열과 설레임, 그것이 제 맘대로 다뤄지지 않을 때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마침내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처음과는 다른 희열, 그리고 내 것과 같지만 조금씩 다른 동종의 악기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처음과는 다른 열망과 욕심, 조금씩 귀가 트여 더 좋은 것을 알아보는 혜안이 생긴 데 대한 자부심, 더 좋은 것으로 연주한다고 해서 내 기술도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처음과는 다른 좌절, 그리고 이 순환고리가 어쨌든 죽는 날까지 계속되리라는 희망 또는 절망감.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 오묘하게 뒤섞인다는 거다. 

책은 미국인으로써 (그러니까 일정 부분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프랑스 생활도 포함한다. 따라서 위에 말한 뒤죽박죽 외에 '파리'라는 도시에서 악기 연주를 하고자 하는 한 이방인의 마음 풍경도 곧잘 이야깃거리가 된다. 나로써는 이 부분이 아주 공감되는 편이었지만 프랑스에 살아본 적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종종 오독에 대한 불안함을 주거나 전체적인 몰입을 잠깐씩 흐트러 놓을 수 있는 부분. 뭐, 어차피 이 작가가 피아노 연주를 하는 성향에서도 보여지듯, 어떤 결과물을 대단하게 내놓으려고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정도 장애는 그냥 무시하고 가자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매개로 하여 이렇게 멋진 책을 낼 수 있는 역량이 혹여 이 부분 때문에 과소평가 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될 정도로, 예민하게 잘 잡아낸 표현들이 곳곳에 자주 숨어 있다. 

읽기 전에는 이 책을 읽고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다며 설레발을 할까봐 지레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역시 악기 같은 걸 지난하게 연습하는 것은 내게 정말 안 어울리는구나 새삼 깨달았달까. 뼛속까지 깊숙이 박힌 이넘의 게으름에 대해 고마와해야 할까 아니면 한심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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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0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리 치니님 부지런히 독서하시고 부지런히 리뷰쓰신다. 헤헷.

뼛속까지 깊숙이 박힌 저의 게으름에 대해 저는 가끔은 고마워하고 그보다 더 자주 한심해하곤 합니다.
네, 저도 피아노를 매개로 해서 이정도의 에세이를 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보다는 저는 이 책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지만 말입니다. 글과 소리와 대화와 연주등,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어요.

치니 2010-11-03 14:07   좋아요 0 | URL
우와 - '우리' 치니님이래, 히히 좋아라.
저, 1Q84 1권도 다 읽었다요. 다음이 너무 궁금하여 도서관에 예약을 미리 안 해 놓은 저 자신을 또 한심해했죠. 이런 건 미리미리 주루룩 해놨어야 했는데, 힝. (그래도 사지는 않고 있는 인내심, 혹은 뼛 속 깊은 게으름 ㅋㅋ)
암튼 1권만 읽은 소감은 '그래도 역시 하루키는 하루키구나' 에요. 뭐 여러가지 면에서요. 좋은 면 안 좋은 면 다. ^-^

아름답죠. 저는 정성일씨가 자신의 책에서 고백했듯이 '모든 예술 분야는 음악에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매개로 한 것은 아름다울 수 있는 보증수표를 이미 가지고 시작한달까,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피아노 배울 마음은 안 들었는데, 마스터 클래스 일반인 청강은 꼭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요! ㅎㅎ

Kir 2010-11-0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자극하신 지름신때문에 부들대는 손가락을 감신히 참았는데 치니님까지!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지를 수 밖에 없군요.
읽고 싶은 마음을 자꾸 억누르려니까 더 참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곧 이 책이 곁으로 오겠군요. 실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치니 2010-11-03 18:23   좋아요 0 | URL
으흐흐, 참지 마세요.
근데 이 책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서(ㅠ) 도서관에서는 금방 빌릴 수 있더라고요. ^-^;
(그것도 에세이 코너가 아닌 음악 - 피아노 코너에 있어서, 처음에는 뭐야 도서관에서 제대로 나눠 놓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다 읽고나니 이 책은 피아노 코너에 있는 게 맞겠다 싶어요. ㅎㅎ)

rainer 2010-11-0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코너 ^^
'미국의 송어낚시'는 낚시 코너에 있었다고 해서 막 웃었는데 말이지요.
(이건 정말 낚시 코너는 아니었어요)
사두고 아직 못 읽어서 오늘은 가방에 넣어 들고 나왔네요.
이런 날씨에 글이 눈에 들어올까요. 놀고만 싶어지는데..!

치니 2010-11-04 14:3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건 정말 아니네요, 낚시 코너! 푸합.

벌써 사두셨구나. 왠지 rainer님이 좋아하실 거 같은 생각이 팍팍 들어요.
날씨 포근하지만 바람이 꽤 부네요. 아침 저녁 코 풀기 대회라도 나가는 심정이지만 쨍 하니 찬 바람은 그래도 정신이 버쩍 드는 맛이 있어요. 히.
 
예술/대중문화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클래식에 문외한이라는 소리는 여러번 이 자리에서 이미 말했고(그게 뭐 자랑이라고), 문외한에게 말러라는 존재는 (심하게 과장하면) 두려움이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만큼은 아닐 지라도, 말러라는 이름 역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대단하다고 회자되는 편인 세상에서, 아직도! 나만 말러를 모르는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그 대단하다는 말러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도 드물다는 현실이 일러주는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그나마 억지로라도 들어봐야지 하고 한 곡 듣기 시작하면 어느새 음악은 저 멀리, 혼자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뭔지 모를 음울함과 난해함에 사로잡혀 기분이 영 안 좋아졌던 경험의 기억까지. 아, 나는 말러를 이해하지 못하나봐, 그치만 음악이란 게 꼭 이해해야만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왜! 다들 대단하다고 하는 거지? 흐응. 

이런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던 내게 10월 신간으로 말러가 다시 다가왔다. 오케이, 어차피 무조건 페이퍼를 올려야 하는 약속이 있고, 이 책으로 하자 싶은 오기(?) 돋는다.  

말러씨, 이번에 걸리면 난해해도 끝까지 들어봐야겠습니다. 어떤 곡이 초보 청취자에게 가장 무난할 지는 책 속에 힌트가 있겠지요. 그 정도 힌트도 없다면, 이 책을 미워할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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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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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두려움은 실존적인 두려움이라 일컬어지면서 평생을 가고, 어떤 두려움은 실제적인 두려움이라 일컬어지면서 평생 그 너머를 산다. 

헤르타 뮐러가 겪은 것은 두 번째 두려움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런 두 번째 두려움을 외면하고 살아도 될 만큼은 (잠시)평화로운 나라, (잠시)평화로운 시대에 살면서 감히 그 두려움이 어떤 종류인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또...그럴 때 문학은 과연 구원인지 아닌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결코, 모른다. 

이 책으로 뮐러는 문학이 그런 두려움에게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꼭꼭 눌러 썼을 문장들이 겉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하고 숨겨진 가시를 뭉뚱그린다. 그렇게 밖에 못했을, 그래서 더욱 찢어지게 아팠을, 그 가시들이 뒤늦게 내 마음짐승도 일으켜 세울까봐 나는 읽는 내내 겁이 나 숨을 쉬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끝끝내 이 책을 놓지 못한다. 토씨 하나라도 놓치면 알 수 없는 죄의식이 사무치게 몰려오는 이 엄정한 책을 쉬이 놓을 수 없다. 단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소화불량을 무시하고 끝끝내 읽어야만이, 그나마 약간 죄의식이 사라지는 것 같은 힘. 그것이 이 책이, 문학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숨쉬는 독재자들의 세상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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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0-10-2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 읽으셨군요 :)
평생 그 너머를 사는 두려움,에 공감-
하아. 스산한 날이에요.

치니 2010-10-27 14:14   좋아요 0 | URL
moon님도 읽으셨어요? 어디선가 뭘 읽고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두었는데, 그럼 그게 moon님이 언급한 거였나...^-^;;

추워요, 건강하셔야 해요. :)

stillyours 2010-10-27 17:48   좋아요 0 | URL
큭. 읽어봐야겠군요! 하셨더랬죠.
헤르타 뮐러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데 뭔가 큰맘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치니 2010-10-27 19:59   좋아요 0 | URL
찾았어요, 어쩐지 첫 문장이 익숙하더라니, moon님의 40자 평에 나와 있었던 거였네요. 이런 식으로 기억은 저 혼자 뒤죽박죽 널을 뛰곤 하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책에 있어서는 한번 일별했더라도 그 감이 좀 오래 남는가봐요. 아무튼 결국, 감사드린다는 말씀. :)

라로 2010-10-28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리뷰 올려주는 책들은 정말 다 읽고 싶어진다는!!
지난 번에 그로칼랭도 리뷰 읽고 스타벅스 갔는데 있어서 몰입해서 읽었었는데
다 못 읽고 왔다는,,,살까 말까 고민중,,그런데 이책도 뽐뿌질 제대로 하셨어요,,치니님,,ㅠㅠ

치니 2010-10-29 12:02   좋아요 0 | URL
^-^;; 제 리뷰 때문이라기보다 나비 언니의 강렬한 독서욕구 때문인 거 같은데요.
그로칼랭은 마지막이 궁금해서 한번 읽고 나서 멈추기는 힘들텐뎅. ㅎ
(아참, 그런데 그 스타벅스, 독서리스트 괜찮네요!)

라로 2010-10-29 16:24   좋아요 0 | URL
스타벅스의 독서리스트는 괜찮은데 문제는 자주 바뀐다는 거...
아니야,,나의 독서 욕구는 그저,,,암튼,,ㅎㅎㅎ
그로칼랭은 아직 마지막이 궁금할 단계까지는 안 읽었다는, 80페이지 정도 읽었나?? 하지만 전개되는 이야기이나 문장들이 참 좋더구만,,그래서 살까,,고민..

2010-10-30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9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0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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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 2010-10-2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틀러 유겐트가 생각난다' 하고 있었는데, 역시 나치와 관련된 거였군요.
전에 읽었던 파시즘 생각도 나네요... 덕분에 잘 봤습니다, 오늘밤 2부 꼭 봐야겠어요!

치니 2010-10-26 13:17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Kircheis님! :)
어젯밤 보셨어요? 저는 생각보다 2부가 헐렁해서 책을 읽어봐야할까 그랬는데, ^-^ 아래 saint236님이 좋은 정보 주셨네요.

Kir 2010-10-26 14:53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가 컸던 탓인지 2부는 좀 아쉬웠어요. saint236님이 알려주신 영화, 찾아봐야겠습니다. 영화를 보면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 것 같아요.

2010-10-26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6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10-2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걸 소재로 만든 영화가 있죠. 디벨레라고. 그 영화를 보면 이것보다 더 느낌이 확 옵니다.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고 타자를 차별하는지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지요. 시간이 되시면 한번 영화를 보심이. 공식적으로 수입된 것이 아닌지라 인터넷에서 서핑을 하셔야합니다.^^

치니 2010-10-26 13:20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 시간은 마구 마구 되는데 인터넷 찾아보는 건 조금 자신이;; 그래도 찾아보겠습니다. 어제 맛만 본 기분이라 영화가 있다면 제대로 함 보고싶네요.

제 깐에는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 따위, 그리고 소수를 차별하는 마음 따위 절대 없다고 은근 착각하고 살았는데 이걸 보고 새삼 자각했어요. 닥치면 나도 별 수 없겠구나 싶으니 마음이 얼마나 ㅎㄷㄷ 인지요. -_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2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가 <휴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 너무도 과묵하고 깔끔한 독일인들을 보며 레비의 팔에 새겨진 수인번호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비명은 학살을 방조한 독일인들이 질러야 하는데 말이죠. 유익한 영상 잘 봤습니다.

치니 2010-10-27 14:15   좋아요 0 | URL
아...프리모 레비, 사실 이 책을 읽고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이었어요. <주기율표>의 은은한 충격도 동시에 떠올랐구요. <휴전>도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파고세운닥나무님의 좋은 인용구 잘 읽었습니다. :)

2010-11-03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4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4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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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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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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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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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쯤 전이던가, 우연한 기회에 저명한 심리학자가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나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다길래 약간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설문지에 답을 적어냈다. 나의 성향은 '아이디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요약되었고, 그가 내게 세상을 잘 살기 위해 해주었던 조언은 '네 정체를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였다. 언제나 가면을 몇 개 이상 준비해서 되도록 치밀하고 자연스럽게 그 가면을 쓰며 살지 않으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충고. 나는 10분이 조금 더 걸리는 설문지 한 장으로 그가 내게 내린 진단에 굴복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생각한 참이라 그런 얘기를 듣고 잠깐은 '모든 심리학자는 사기꾼'이라는 말을 떠올리기도 했다는 걸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지만, 파하하 크게 웃으며 '네네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라 해도, 현대 사회에서 내 정체를 섣불리 알리는 짓은 자폭이라는 점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모든 관계가 위선이 되지 않겠느냐고? (혹은 위악) 그래도 할 수 없다. 내가 우선 살고 봐야 하니까. 1은 2가 되지 못한다. 1은 2가 될 거라는 불가능의 끝을 향해 가지만 사실 0이 되지 않기 위한 불안에만 사로잡히는 운명인 걸. 0이 된다면 살 수 없다. 살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이 불안과 우울의 일생을 끝내고 조용히 내 정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데서 오는 고독을 어떻게 회피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로칼랭(격렬한 포옹이라는 뜻이다). 내 팔이 길면 길 수록 좋다. 사랑할 대상이 있으면 그를 껴안고 대상이 있어도 가까이 할 수 없으면 나를 껴안는다. 이 때의 고독은, 적들에게 정체를 알리는 것보다 훨씬 안온하고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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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1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치니님께 가서야 비로소 제 빛을 찾는군요!
:)

치니 2010-10-19 16:37   좋아요 0 | URL
책도 연이 있다면 저랑 이 책은 연이 잘 맞았어요. 좀 더 어릴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갸우뚱하고 지나쳤을 많은 말들이 가슴에 콕콕 와서 박혔어요. 자주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읽었어요. 고마와요 다락방님. :)

2010-10-19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illyours 2010-10-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다시 읽었는데,
아아, 로맹 가리는 다시 읽을 때 더 좋은 것 같아요.
치니님 리뷰 보니 <그로칼랭>을 어서 읽고, 어서 다시 읽고 싶어요.

치니 2010-10-20 11:34   좋아요 0 | URL
그럴 거 같아요, 다시 읽어야 할 거 같다고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들은...>, 저 역시 읽어야겠어요. 아직 못 읽어봤거든요.
새삼, 아직 못 읽어본 좋은 책이 많다는 게 기뻐요.

굿바이 2010-10-2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체를 알리면 그건 아니라고 하고, 가면을 쓰면 정체를 알리라 하고, 완전 삐뚤어져 버려야겠다고 매일 다짐해요 :)

치니 2010-10-20 11:35   좋아요 0 | URL
하하 굿바이님.
귀여운 면모가 나날이 돋보이는 굿바이님.

2010-10-20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0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